나이들다.
나는 젊다. 15세 우리 반 아이들이 들으면 금방 코웃음 칠 일이나, 아니 실제 콧방귀를 뀌며 시시덕거리다 외모지상주의와 Ageism에 관한 길고 긴 종례 말씀을 듣는 대가를 치렀지만 누구 뭐라 해도 지금 나는 젊다.
‘젊다’라는 말의 의미를 ‘절대적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까? 상대와 비교하고, 과거와 대조하며 파악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로 별로 사전 찾아볼 일 없던 ‘젊다’라는 말의 의미를 검색하니 ‘한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젊은 게 맞다. 나는 지금 가장 왕성하고 활기차게 인생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친구와의 모임도 가장 왕성하게,
직장에서도 그간의 경험을 되살려 활기차게, 가정에서도 힘든 임신, 출산, 육아를 거쳐 나만의 시간으로 풍성하게,
글을 쓰며 ‘ 브런치’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활발하게, 팔다리 멀쩡하여 요가도 배드민턴도 열렬하게 운동하고 있으니
‘젊다’가 맞다.
떠오르던 386세대에서 이제 586세대가 되었다. ‘인생 100세 시대’에서 절반을 산 것이다. 나이 들어가니 ‘젊음’을 생각하고 ‘노후’를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쉰’이면 완전 노인의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쉰’이 되고 보니 나의 마음은 그에 따라가지 못 하고 아직도 청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예전의 인생 선배들도 그러했을 텐데, 마치 처음부터 중년, 노년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기고 그들을 ‘늙음’으로 치부해 버렸었다.
젊음은 젊음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다. 늙음이 젊음을 자꾸 불러낸다. 사실 육체에서 ‘늙음’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소화력이 떨어져 조금 많이 먹으면 부대껴 힘들고, 사래가 잘 걸려 식탁에서 재채기를 자주하고, 평생 지성피부로 기름기를 자랑하였으나 이제는 발뒤꿈치가 버석거리고, 모임 후 다음날이 버겁고, 깜빡깜빡 잊어버리기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역시 ‘노안’이다. 늙으니 책 읽는 것이 불편해 가장 우울하다는 어느 유명인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실감을 못 했었는데, 이것이 내 일이 되다 보니 우울을 넘어 심할 때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다. 30년을 콘택트렌즈를 끼고 살았다. 렌즈에 최적화된 눈인지 흔한 눈병 한 번 없이 렌즈와 친했는데, 안경이면 벗기라도 해서 볼 텐데 벗을 수도 없으니 이제 렌즈도 멀리할 때가 된 듯하다. A4 두 면으로 인쇄된 시험지를 보기 어렵고, 깨알 같은 아이들의 글씨를 확인하려면 이마를 찡그릴 때가 자주 오고 있다.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구부정하고, 불룩하고, 듬성듬성하고 갈라지고 메마른 육체와 마주할 것이다. 자연적 노화에 질병까지 보태져 육체적 고통과 불편이 더해질 것이다. 부모님들은 벌써 80대에 들어섰고, 노령화로 급속히 늙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나도 노인으로 한 자리 차지할 날이 머지않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학습을, 취직을, 사랑을 고민해 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늙을 것인가를 궁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육체적 힘듦으로 고통 받던 엄마의 노년을 함께 했다. 총명하던 젊음이 늙음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 치매의 고통에 빠진 노인들의 모습을 TV에서 자주 목격했다. 노화로 인한 인지 능력 저하로 노인 교통사고 발생이 빈번하다는 뉴스와 더불어 노인운전면허증 반납을 권유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혼밥, 독거노인, 고독사로 이어지는 외롭고 불쌍한 노인들의 소식을 들었다. '나무도 나이 들면 속이 빈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늙음을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늙음을 맞이하고 준비할 것인가’
수년 전 ‘노란 집’이라는 수필을 읽었다. 작가의 재치와 막히지 않는 신선한 사고가 너무 매력적이라 한 동안 글 속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80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음’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도 이처럼 나이 들고 싶었다. 어릴 때 말고는 인생의 롤모델을 별로 찾지 않고 살아왔는데 모처럼 만난 늙음의 ‘멘토’라고 해야 할까! 닮고 싶은 세련된 글의 작가는 바로 박완서 선생이었다. ‘노란 집’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문득 마주친 눈길에는 신혼시절의 수줍음도, 한창 때의 열기도, 중년기의 짜증도, 설늙었을 때의 허망함도 없었다....
영감님의 사치와 마나님의 허영!
사람은 속절없이 늙어가는데 계절은 무엇하러 억만년을 늙을 줄 모르고 해마다 사람 마음을 달뜨게 하는가.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물의 흐름도 수 많은 들과 굴곡을 만남으로써 속도가 조절되듯이 우리의 발전도 반대나 회의하는 입장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곤두박질을 면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게 아닐까.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될 중요한 시기에 누가 사랑을 주고 영향을 미쳤는지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게 복잡하면 기본 정신보다는 쓸데없는 것부터 익히게 되는 것 같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딸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건 내 노후대책 중 하나이다.
인생 80이 정말 후딱 지나감을 시부모님을 보며 느낀다. 여느 장례식장에서 만약 고인의 나이가 80대이면 문상객으로서 죽음을 예사롭게 이야기 나누었을지도 모를 텐데 막상 시부모님을 떠올리면 그 연세가 죽음에 대해 그리 애통할 것 없는 나이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80과 나의 80은 분명 다르다. 끝까지 오래 살자 라는 주의는 아니어도 누구에게도 살 만큼 산 나이는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은 늘 애통하고 아쉽고 억울하다. 그것이 100살이다 하더라도……. 그래서 난 어불성설의 1위 단어로 호상이라는 말을 꼽는다.
갱년기 증상들이 더 짙어지고 많아지고 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아무리 위안을 삼아도 역시 불편하고 쓸쓸하고 외로울 것이다. 점점 깊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꼰대로 치부되어 눈물 흘릴 수도 있으리라. 욕하면서 닮는다고 어느 날 문득 내가 싫어하던 부모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화들짝 놀라며 부정하던 ‘아줌마’라는 말이 ‘할머니’로 곧 바뀔 것이며 나만 불편해하리라. 위문편지 쓰던 굳건한 군인 아저씨의 얼굴이 저리 앳된 얼굴이었나 다시 쳐다보리라.
하늘의 명을 알지 못 한 채 50(知天命)을 보내고, 순해지지 않는 귀를 지닌 채 60(耳順)을 보내고, 마음먹은 대로 했다가는 낭패를 겪는 어리석은 70(從心)을 지나 팔순을 맞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든다.
티 없이 곱게 지나친 사춘기와는 달리 갱년기는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사춘기와 갱년기가 만나면 갱년기가 이긴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더구나 지랄발광 사춘기처럼 품어 줄 부모도 없으니 자체발광 갱년기가 되도록 애써야하지 않을까?
잠자리에서 뒷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해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우울하지 않게 받아들임을 다짐해 본다.
아프지 않게 잘 먹고, 운동하고, 걸어 다니자.
외롭지 않게 관계를 배려하고 품어내고 이기려하지 말자.
가난하지 않게 절약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자.
10년 뒤 이 글을 보면 또 가소롭다 할지라도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고 있는 지금 나이의 길에서 이정표를 세워 본다. 갱년기를 찾아보니 영어로 The turn of life로 나온다. The turn을 어느 방향으로 할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나이 탓도, 세월 탓도 아닌 온전히 내 덕분으로 곱게 잘 늙어가겠다.
아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
가난하지 않게
갱년기여! 와라. Turn 한 번 멋지게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