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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50대 젊은이! 요리로 사랑꾼이 되었다.

사위의 요리, 아빠의 요리, 남편의 요리

by 도시락 한방현숙
남편은 이렇게 자랐다.

50대 중반의 남편은 삼 형제 중의 첫째로 결혼 전 30 평생을 전업주부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아들만 셋인 집안의 장남이기에 이렇다 할 형제들 심부름 스트레스 하나 없이 자랐을 것이고, 전업주부인 어머니 덕에 라면 하나 제 손으로 끓여 먹는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시콜콜 남편의 성장과정을 언급하는 이유는 아마도 가정에서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의 혜택을 누린 거의 마지막 남자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직도 사회는 양성평등으로 갈 길이 요원해 보이나 가정에서는 ‘딸 바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아들, 딸 구분이 옅어지고 있고, 30대 젊은 아빠들이 육아에 엄청나게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주변의 이런 변화를 볼 때마다 ‘남편 세대는 상대적으로 참 편안하게 결혼생활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1990년 대 결혼을 하고

맞벌이 부부였지만 ‘독박 육아’라는 말도 모른 채 아이들을 길러내고, 부엌살림을 책임지고 빨래를 돌리고 개키고 그리고 매일 출근을 하고……. 딱히 그 시대, 그 세대 남자들이 나빠서가 아니고, 사회 분위기가, 그들의 성장과정이, 우리의 배운 바가 그러했기에 그렇게 빚어낸 90년대 모습이었다.

자상하고 따스한 인품의 남자이지만 전업주부 어머니 밑에서 가사에 참여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신혼 초에는 살림이며 육아며 도맡아 애써주시는 장모님 덕분에 퇴근 후 설거지조차 할 일이 별로 없었던 남편은 웬만하면 아마 이대로 쭉 부엌에 들어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신혼 초 가부장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은 허둥거리고 혼란스러워했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가사 노동 분담에 대한 몇 번의 싸움이 있었는데 맞벌이 부부로서 가사노동의 힘듦을, 홀로 육아의 부당함을, 나는 ‘대학에서 여성학을 이수한 전문직 여성’으로서 용납할 수 없음을 농담 반, 진담 반 들이대며 싸우곤 했지만, 이마저도 엄마가 몸져누우면서부터는 복에 겨운 다툼으로 멈춰 버렸다.

육아, 가사, 간병으로 지칠 때

어린아이들을 돌봐주던 엄마의 발병은 우리 가정을 심하게 흔들 만큼 엄청난 태풍이었기에 누가 옳다 그르다 싸울 시간조차 내지 못한 채 우리는 30대, 40대를 안간힘을 쓰며 파도를 헤쳐 달려야만 했다. 육아뿐만 아니라 친정엄마 간병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는 엄마로서, 딸로서, 직장인으로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흔들리며 버텨내고 있었고 아이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는 할머니 부재의 충격과 어린 동생들에 대한 걱정을 아직까지 아픈 마음으로 떠올릴 만큼 힘들어했고, 어린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머니 품에서 떨어져 새벽부터 어린이집으로 몰리 듯 눈 비비고 일어나야만 했다.

우리 가족 모두 힘들고 어두운 터널 속에 있던 시절이었다.
남편의 발길이 부엌으로

아마 그쯤부터였으리라. 남편이 부엌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기 시작했을 때가. 급한 대로 막내 우유병을 닦아야 했고, 라면을 끓여야 했고, 설거지를 해야 했던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가스 불을 켜고 냄비나 프라이팬을 올리고 뭔가를 굽거나 끓이더니, 본격적으로 레시피를 검색하여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어언 10여 년이 흘러 이제는 A급으로 식탁에 짜잔~하고 내놓는 요리가 10 여 가지가 넘는다. 아빠가 요리를 만들어 낼 때마다 박수로 환호하며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 던 어린 딸들의 언약이 20대가 넘은 지금도 유효한 것을 보니 어려서 그냥 하던 소리만은 아닌 모양이다.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드나들며 고생하던 남편은 부엌도 수시로 드나들며 나의 힘듦을 나누려 했다. 깊어져만 가는 엄마의 병환으로 우리 가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따뜻한 음식으로 위로해 주었다. 어른들의 분주함 속에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던 아이들도 고소한 버터 향으로 달래주었다.
왁자한 딸들의 '아빠의 요리' 말하기
아빠의 토스트

일요일 아빠가 만들어 주는 ‘토스트’는 최고의 아침식사였다. 한창 가족 등산에 빠져 있을 때 청량산 초입에서 사 먹던 길거리 리어카 토스트 맛을 그대로 재현한 아빠의 토스트는 양파와 당근이 듬뿍 들어간 달걀 지짐 위에 솔솔 설탕이 뿌려진 고소한 맛이었다.

버터 향을 맡으며 우유를 들이켜는 아이들 입가의 우유 자국과 웃음소리는 지친 피로를 풀어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주말 늦은 아침마다 아빠의 토스트로 우리는 참 행복했었다.
사위의 뭇국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뭇국은 유달리 시원했다. 고기는 물론이고 특별히 들어간 양념도 없는 것 같은데 어찌나 담백하고 시원하던지 남편은 두 그릇 뚝딱이었다. 우리가 뭇국을 좋아하자 가을엔 거의 뭇국을 단골로 끓여 내셨다. 그런데 저리 병상에 누워 계시니 무맛이 보약인 선선한 계절이 와도 식탁은 허전하기만 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뭇국을 끓여낸 것이다. 국 간장으로 알맞게 간을 맞추고 파, 마늘만으로 양념을 한 길쭉길쭉하게 채 썬 투명한 무가 가득인 시원한 뭇국을 말이다. 사위가 끓인 뭇국을 마비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드시면서 입가에 웃음을 지어내던 우리 엄마…….

밥을 말아 오랜만에 잘 잡수신 기억이 지금도 뭉클하다. 아마 사위의 다정과 사랑으로 마음이 평안하셨으리라.
아빠의 오징어 볶음

남편의 잦은 부엌 출입은 일품요리에서 만족하지 않고, 양파 조림이나 감자조림 오징어 볶음 같은 반찬으로까지 나날이 요리 실력을 높였으니 그중에 최고는 당연 오징어 볶음이었다. 매번 레시피를 점검하느라 프라이팬 보는 횟수만큼이나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지만 언제나 요리의 맛은 성공이었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기까지 한 오징어 볶음은 밥반찬으로 아이들에게 인기였다. 큰애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날이나 뭔가 허전한 날이면 아빠의 오징어 볶음이 최고의 해결사라고까지 말하며 남편의 요리를 추켜세웠다.

윤기까지 번지르르한 남편의 오징어 볶음은 우리 가족의 화목이요, 붉은 사랑의 웃음이었다.
남편의 멸치국수와 번데기 탕

나는 특히 남편의 멸치국수와 번데기 탕을 좋아한다. 남편은 국수를 쫄깃하게 삶을 줄 알고, 비린내 안 나는 멸치 육수를 만들 줄 안다.

남편이 정성껏 뜨끈한 멸치국수를 말아내는 날에는 온몸이 피로에서 풀리는 것 같다.

평생 번데기를 먹어 본 적 없던 나는 남편의 요리로 번데기 시식에 입문했다. 통조림 번데기에 마늘과 고춧가루, 청양고추와 다진 양파를 넣어 뚝배기에 끓여낸 번데기 탕은 술안주로도 일품이지만 그냥 먹어도 물론 맛나다. 번데기 탕을 먹을 때는 꼭 티스푼이 들려있다. 티스푼으로 번데기를 하나하나 건져내 깨작거리며 먹는 맛! 그렇게 먹어야만 더 맛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오늘도 번데기 탕을 깨작거려 본다.


남편은 50대 젊은이! 사랑꾼이 되었다.

50대 중년의 아버지로서 어쩌면 튕겨나갔을지도 모를 가족의 끈, 또는 딸들과의 세대 차이를 아빠의 요리, 남편의 부엌으로 지켜내고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요리는커녕 평생 차려 준 밥상 앞에서 큰소리만 치며 외로울 뻔했던 남편이 이렇게 가까이 가족과 더불어 딸들의 인기를 차지하며 소통하는 아빠와 남편이 될 수 있었던 비법!

엄마의 정겨운 된장찌개를 떠올리며 허한 마음을 다독일 때 우리 딸들은 아빠의 요리를 함께 떠올리며 지친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힘들 때 다시 시작할 힘을 어쩜 아빠의 평범한 요리 한 접시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의 요리를 떠올리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종종 행복한 나처럼 말이다.

남편이 도전할 다음 요리는 ‘불고기’란다. 방짜 불고기 판이라도 살 기세로 송도의 유명 불고기 맛 집의 맛을 거론하고 나선다. 나야 언제나 OK이다. 남편의 불고기 요리가 성공하면 시간상, 거리상 얼마나 이득인가! 외식비 절약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질 좋은 불고기 감을 어서 주문해 놓아야겠다. 식탁에 남편의 요리 하나 더 추가한다, 매우 흐뭇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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