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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부엌 전성시대!

by 도시락 한방현숙
그 시절

주문한 새 전기밥솥이 배달되었다. 작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본 3인용 밥통은 귀엽고 깜찍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솥이 작았다. 3인용 밥솥이라……. 10인용 밥솥으로 1년에 80Kg 쌀 한 가마니를 두 가마니 하고도 반을 거뜬히 해치울 때가 언제던가! 그야말로 ‘부엌 전성시대’의 이야기이다.

부엌 전성시대

올망졸망 세 아이가 아기 새처럼 입을 쩍쩍 벌려대고, 엄마가 계시고, 늘 저녁을 함께 하던 남편까지……. 부엌은 항상 화기가 타올랐고 삶의 생기가 가득했다. 퇴근하고도 척척 햄버거 패티까지 손수 빚어낼 정도이니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지금은 아련하기만 하다.

돼지고기 듬성듬성 넣은 흔한 김치찌개 하나에도 환호하며 맛나게 먹어주는 아이들이 있어 힘든 줄 몰랐다. 시금치 하나라도 무칠 때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끌리 듯 간을 보겠다고 ‘나도 나도’ 외쳐대는 아이들이 있기에 요리가 재미졌다.

인터넷을 연신 검색하며 짜장면, 회 초밥, 간장게장, 만두, 스테이크, 철판요리, 전복죽, 샌드위치, 갈비탕, 연어샐러드, 장아찌에 각종 김치까지……. 그렇게 아이들 초, 중, 고 시절을 부엌에서 기쁘게 보낸 듯하다.

직장 다니는 엄마지만 먹거리만큼은 ‘집밥’으로 책임진다는 강한 자부심과 그것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가장 큰 사랑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 나의 ‘부엌 전성기’이었던 거 같다.
그립다.

그리고 그때는 엄마가 계셨다. 거동이 불편하여 하루 종일 침대에 묶여있는 몸이었지만 계절이 흐르고 철이 바뀌면 음식으로 나를 채근하셨다.

매실이 실하겠구나.
지금 마늘을 사야 싸게 산단다.
소래포구에 꽃게가 한창이겠구나.
지금이 곰취가 가장 연할 때란다.
호박 쌈이 먹고 싶다.
꼴뚜기와 병어회는 어떨까?

사춘기 딸도 아니면서 나는 대부분 엄마 심부름에 투덜거리며 시장바구니를 챙겼었다. 이렇게 그리워할 줄은 모르고 엄마가 아직까지도 나를 간섭하고 지휘한다고 생각했었다. 50 평생 한치의 떨어짐 없이 엄마 옆에서 살아 그 아쉬움을 모르던 복에 겨운 후유증이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곧 행복이었음을 사춘기를 벗어난 딸은 언제쯤 알아채는 것일까? 나를 보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멸치육수에 신 김치 넣어, 끓어오르면 마른국수 그대로 넣어 걸쭉해진 국물 맛이 특별한 ‘타래기 국수’라 부르던 그것을 끓이고 싶다. 간장에 쓱쓱 비며 맛나게 드시던 콩나물무밥과 빠알간 닭발도, 맑은 쇠고기 뭇국과 곁들여 식탁에 차려 놓고 싶다. 그리고 엄마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시간을 훨씬 많이 되돌려 우리 엄마가 끓여 주던 찌개와 가지나물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바쁜 몸놀림 중에도 때때로 보내는 엄마의 애정 어린 눈빛만으로도 쑥쑥 자라나던 그 시절에 다녀오고 싶다.

엄마, 엄마! 가난했던 그 부엌이 어찌 이리 그리울까요?
때때로 차가운 부엌

시간이 흐르며 화기가 자주 끊기던 부엌은 더 이상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그 부엌에 여전히 서 있으나 그 부엌이 그 부엌이 아니다. 전자파 운운하며 한사코 손 사레를 치던 전자레인지도 떡하니 들여놓았다. 6인용 식탁은 3분의 1 자리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내고 있고, 빛바랜 요리책은 더 이상 쓰임이 없다.

요리책이야 인터넷 검색으로 자리를 내어줬다 하겠으나, 화기 가득했던 윤기는 어디서 찾아올까나!

요즘 저녁은 대부분 혼밥을 한다. 혼밥의 한적함을 내 귀로 다시 내가 듣는, 나의 씹는 소리만이 덮을 뿐이다. 이 적적함을 둘째는 대전에서, 남편은 부여에서 날마다 단톡으로 공유하려 하나 해소되지는 않는다. 이 시각 도서관에서, 학교 급식에서 저녁을 먹는 첫째와 막내도 내 부엌에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6인용 식탁 귀퉁이에 대충 차려진 저녁식사를 내려다본다. 10Kg 쌀 포대는 몇 달째 홀쭉해질 줄 모르고, 즉석 밥 용기는 쌓여만 간다. 언제나 간편하게, 남길 걱정까지 덜어주는, 건강까지 챙겼다는 냉동식품은 종류별로 레인지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것이 3인용 압력밥솥이겠다.


평소에 지인들에게

“우리의 생활, 의식주가 모두 가정 밖으로 나왔는데, 식(食)만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아파트마다 공용 식당이라도 만들어 단체급식이라도 해야 가사 노동이 줄어들 텐데…….”

라고 역설(力說)하던 내가 부엌의 전성기를 그리워하고 있다니, 이 무슨 역설(逆說)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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