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채소 주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냉기가 가시기 전인지 주변에 자잘한 물방울을 가득 안고 서 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남편은 한참 전에 출발했을 시각이다. 제대로라면 이 주스는 남편 손에 들려 있어야 한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는 남편의 아침은 두유와 생식과 이 주스가 전부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시간 절약을 위해서 또는 나의 아침잠을 위해서 수년간 해 온 남편의 아침 루틴 중의 하나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바라본 주스가 왠지 아리게 다가온다. 빨리 들고 나가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남편을 붙잡아 손에 쥐여 주고 싶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떠난 지 오래전이다. 뭔가 서두르다 놓쳤을 주스가, 대단한 음료도 아닌 주스가 자꾸 마음에 밟힌다.
아주 오래전 그림이 하나 떠오른다. 만원 버스에 겨우 실려, 차창 유리에 얼굴을 맞댄 채 버스 출발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저쪽에서 급히 뛰어오는 엄마를 보았다. 남루한 치마에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손에는 은빛 도시락 반찬통이 얼핏 보였다. 오늘의 도시락 반찬, 멸치볶음이 담겨있는 통이었다. 엄마와 내가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결국 그 반찬통을 주고받았는지 아니면 버스가 야속하게 떠났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때 나의 마음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행여라도 맨밥을 먹을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뛰어왔을 엄마의 잰걸음이 뭉클함으로 가득 찬 등굣길이었다. 엄마의 초라한 행색이 마음 아프고 쓰린 아침이라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종종 되살아난다.
먹이고 입히고 싶은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고,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맛난 음식 앞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거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먹거리를 장만하는 모든 일이 다 그러할 것이다.
사람은 커다란 사랑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다. 소소한, 사소한, 자잘한 관심과 사랑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퍼져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볼록’하며 사랑의 결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를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도 하루를 감당할 힘을 얻을 때가 있다.
사랑받은 기억이 많다. 엄마가, 오빠가,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었고, 친구가, 남편이, 딸들이 나를 위해 웃었었다. 사랑받고, 인정받은 건강한 경험들이 나를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뭉클하고 아름답다. 제 가족 챙기는 마음도 이리 진한데, 가족을 넘어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말해 무엇하리. 먹이고 입히고 싶은 마음으로 가족을 돌아보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까지 살펴본다면 최소한 헐벗음에 굶주리다 혼자 시들어가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먹이고 입히고 싶은 마음만큼 순수한 애정이 또 어디 있을까?
나를 위해 오늘도 먹이고 입히려 애쓰는 사람! 그 얼굴을 떠올려 보면, 오늘 그래도 살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