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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g 금, 두바이 금 시장

IMF 와 우리 교육

by 영동 나나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약속했잖아요?”

“신의라는 것이, 아니 상도의가 있는 건데…”


한국에서 금세공업을 하시는 분이 20kg 주문을 받아, 두바이로 직접 가져왔다. 도매상에게 물건을 넘기고 약속된 잔금을 받으려 했지만, 이미 지급한 계약금은 포기할 테니 물건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큰 손해를 입게 된 사장님은 코트라를 통해 내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그것이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역을 맡기로 했다.


“요즘 한국 금이 하루에 100kg씩 들어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국민의 장롱 속 예물이, 고스란히 포장되어 두바이로 수출되고 있었다. 결혼 예물, 반지, 목걸이, 팔찌들이 중동 금 시장에서 '한국산'이라 불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도매상의 말은 지금 들어오는 한국 물건은 금값만 받고 세공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오신 사장님은 며칠을 머물며 사정을 했지만 결국은 가지고 온 물건을 다시 가져가야만 했다. 공항에서 헤어지며 바라본 그의 뒷모습은 20kg이 아니라 20톤의 짐을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시세로는 30억 원 정도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얼마 후 나는 두바이 금 시장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손님이 몰리면 도둑맞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5평 정도의 가게에 세 명이 하루 10시간을 지켜야 했다. 돈도 잃고 시간도 잃었지만 배운 것은 많았다. 세상에는 ‘몸에 밴 기술’이라는 게 있었다.


가게 건너편에는 파키스탄인이 운영하는 꽤 큰 규모의 가게가 있었다. 매일 오후가 되면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와서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둘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내 시선과 마주치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곤 했다. 처음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이들은 학원도 안 다니나, 숙제도 안 하나?'


그러던 어느 날, 그 가게에 손님 한 명이 들어와 한 시간 넘게 가격 흥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고, 아이들은 조용히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밀고 당기는 말 속에서, 돈이 오가는 감정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이미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가게를 물려받는다면, 그들을 이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실제 나는 그런 장사꾼들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2년 반만에 금시장을 떠났다. 투박한 그들의 손은 금을 다룰 때는 섬세했으며, 정확하게 무게를 아는 손저울, 디자인과 세공을 판단하는 눈, 흥정에 적당한 이상한 영어로 말하는 기술, 빨리 판단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아랍 상인들의 근성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건을 살 때 빨리 사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다. 화끈하다. 파는 것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장사의 기술이 없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두바이 금 시장을 오는 영업 사원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를 잘한다고 뽑혀 온 사람인데 장사의 기술은 없었고 경험은 더욱 없었다. 오로지 가격만으로 경쟁하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소매상에게서는 한국 물건을 이탈리아 상품이라고 팔고 있는데, 우리가 받는 가격은 중국 세공품의 가격을 받고 있었다.


두바이에서 가장 큰 도매상인 ‘DAMAS’라는 곳에 처음 거래를 하기 위해 매니저를 만나러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소년이 나와 인사를 했다.


“매니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It’s Me”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사무실에 심부름하는 아이 정도로 생각했다. 매니저라고 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갔다가 십 대의 소년을 만나게 된 것이다. 미팅하는 동안 물건에 대한 품평과 가격을 정하는 것, 거래의 조건들이 흔들림이 없었다. 나같이 어설픈 장사꾼은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흥정도 할 수 없었다. 중학교를 안 가고 가게에서 일을 해 왔고, 이제 미국으로 보석 공부를 하러 간다고 했다. 사는 방법, 공부하는 방법이 그렇게 달랐다.


나는 그 시장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쓴맛을 보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식의 교육과 경험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파키스탄 소년들처럼, 삶을 보며 자라는 교육이 한국에선 왜 어려울까? 그때 공항에서 금을 되가져가던 사장님에게 필요했던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감각이 아니었을까? 그 후로 시간이 많이 갔지만 우리 교육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우리 아이들이 재미있게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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