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네가 학생이니?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중에서 한 영화감독이 깐깐하게 작업하기로 유명한 음향감독 박도경(에릭 분)에게 '너 지금 예술하니?'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분명 영화는 예술의 한 분야임에도 기묘하게도 이 장면에서 예술이라는 단어는 선명한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상업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해진 예산과 일정의 제약 아래에서 움직여야 함에도 박도경이 주변의 현실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만족만을 추구한다는 날 선 비아냥거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어떤 말들은 원래의 좋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때로는 비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신입사원 무렵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것도 비슷한 일이었다. 언젠가 한 번 사수가 툭 던지듯 남기고 간 '네가 학생이니?'라는 말이 그것이다. 간단히 처리해야 하는 문서작업을 두고 너무 오래 붙잡고 하나하나 고민하며 끙끙대는 바람에 들은 잔소리이었다. 마감이 급한 문서도 아니었고 딱히 감정이 실려있던 말도 아닌 만큼 내가 그 말에 상처를 받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꾸지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조금 얼떨떨해졌던 것만큼은 선명히 기억한다. 세상에, 학생 같다는 말이 비난이 될 수도 있다니!
그건 이전에 내가 살던 학생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계는 학생 다움을 추구하는 세계였다. 학생이란 단어는 마땅히 지켜야 할 인간다움의 이데아 같은 것이었고, 우리는 늘 '학생답지 못함'을 이유로 혼이 났다. '학생이 되바라지게',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같은 말들 속에서 학생은 자신의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존재를 의미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듣게 된 '네가 학생이니?'라는 말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의미였다. 이 선문답 같은 말은 지금 내가 몸담은 세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세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이 말은 지금부터 내가 살아가야 하는 회사원의 세계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우선순위와 다른 가치 다른 중력을 가진 완전히 다른 공간임을 알리는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1) 타인이 원하는 일을 위해 2) 내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고 3) 그 대가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노동을 주고 돈을 받는다는 심플하기 그지없는 이 거래의 규칙은 우리 사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규칙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 규칙은 어느새 내가 다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내 세계를 바꾸어가고 있었다.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돈과 노동이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중심축이 되는 일이었고, 그건 의미의 우주가 변하는 일, 자아와 세계와 시간과 삶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는 일, 그러니까 내가 알 던 세계의 자전축이 23.5도쯤 기울어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회사원이 되고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일의 목적이었다. 학생일 때도 우리는 학교의 수업 진도에 맞추어서 선생님이 시키는 공부를 했다. 하지만 억지로 공부하는 순간에도 학생에게 있어서 '공식적인' 공부의 목표는 언제나 내 자신의 성장과 발전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을 듣고 자랐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때에는 '공부해서 남 주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같은 말로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회사는 달랐다. 회사에서 '공식적인' 일의 목표는 주어진 업무, 그러니까 타인이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타인이 요구한 업무와 일정에 맞춰 남을 위해 일했고 내 자신의 성장과 발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또 종종 정말 하기 싫은 일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렇더라도 불법적인 일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우리는 주어진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을 돈을 받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대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 시절 우리에게 돈은 목표를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 시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은 공부였고, 학비를 내고 교재를 사고 인터넷 강의를 끊는 등 적지 않은 돈을 공부하는데 썼다. 그 모든 비용들이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쓰는 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는 순간 돈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원에게 돈은 수단이 아니라 일의 목적이었다. 우리가 하루의 가장 좋은 시간을 떼어내서 회사에 가고 남이 시키는 일하는 것은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월급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의 세계에서 회사원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세계에서 돈을 위해 시간을 쓰는 세계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회사원의 세계에서는 자연히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얼핏 보면 학생과 회사원의 일과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양쪽 모두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어딘가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학생은 학교로 등교하고 회사원은 회사로 출근한다는 목적지의 차이만 눈에 띌 뿐이다. 사실 우리가 경험한 학교라는 근대교육 시스템이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할 수 있는 산업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 근대에 만들어진 제도임을 생각한다면 학생과 회사원의 일과가 비슷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오히려 둘 사이의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퇴근 이후의 시간이다. 원칙적으로 회사원에게 퇴근 이후의 시간은 일과 분리된 시간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최소한 근로시간 이외의 시간에 대해서는 개인의 시간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퇴근 후나 주말에 동료에게 회사일로 연락을 하는 일을 실례로 여겨지고, 그래서 피치 못하게 연락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대체로 상대에게 미안해한다. 물론 실례가 실례인지 모르는 이들도 여전히 현실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주류는 아니며 사람들은 이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근로시간이 돈을 받고 판매한 '남의 시간'인 만큼 오히려 퇴근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개인의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반면 학생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상반된다. 퇴근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는 학생과 회사원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숙제라는 의미의 영어단어 'homework'이다. 숙제란 집(home)에서 하는 일(work)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학생에게 공부란 집에서도 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모두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반강제적으로 교실에 앉아있고 학교가 정한 교육과정과 그날의 수업 진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공부하고 있더라도 원칙적으로 학생에게 공부는 '선생님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나를 위한 시간'이다. 즉 학생에게 하루 24시간 전체는 모두 나를 위한 시간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일과 삶은 제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보상에 대한 기대도 완전히 달라졌다.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생활기록부에 적을 장래희망을 고민하던 시절, 학생에게 공부란 대개 아주 먼 미래에 아주 크게 돌아올 장기투자에 가까웠다. 아직은 적자뿐인 조그마한 회사지만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을 모두 쏟아부어 회사를 키우는 스타트업 CEO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아 '미래의 나'라는 자산에 투자했다. 심지어 고3 때는 1년 내내 전교생이 주말 없이 밤 10시까지 야자를 하기도 했다. 거기에 높은 사교육비와 일 년에 천만 원에 달하는 대학교 학비까지 더해져, 적지 않은 가정에서는 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온 가족의 자원이 총동원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게 될 보상은 아직 불분명했다. 학생에게 보상은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몫으로 항상 유예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회사원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우리는 매일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월급날에 정해진 액수의 돈으로 월급을 받았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며 즉각적이었다. 회사원의 세계에서 당장의 월급이 아니라 먼 미래의 막연한 보상을 약속한다면 그건 대개 사기 아니면 착취였다. 주로 사회초년생들이 경험하는 열정 노동이 그랬다. '개인의 성장'이니 '값진 경험'이니 하는 달콤한 말들은 '타인에 대한 노동'을 마치 '자신에 대한 투자'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사회초년생의 노동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고 그저 달콤한 말로 대가를 퉁치려는 이런 태도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보상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학생의 세계에서는 좋은 것이기만 했던 성장이나 경험 같은 말들도 회사원의 세계에서는 숨겨진 가시를 경계해야 하는 말이 되었다.
보상의 방식이 달라지자 미래에 대한 전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미래의 꿈나무' 시절, 우리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미래는 아직 미정이었고 그래서 불안과 기대가 공존했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업무를 익히고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막연했던 미래는 점차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회사원으로 일하는 한 나의 하루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지금과 비슷한 일상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매일의 일상이 쌓여 다다를 미래의 모습 또한 지금 만나는 선배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특히 통장에 찍힌 숫자들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미래를 가늠하게 했다. 몇 개의 수식에 앞으로의 월급과 근속연수, 월급인상률과 물가상승률을 대입해 넣으면 곧바로 내가 벌 수 있는 생애소득이 나왔다. 별 탈 없이 계속 일한다면 언젠가 아파트 한 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막연했던 미래는 꽤나 구체적이고 예측 가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예측가능성은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당장 다음 달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마음에 큰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먼 미래를 떠올려볼 때면 갑자기 인생이 시시하고 뻔해져 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지곤 했다.
사실 내가 느낀 이 초조함의 감정은 바로 삶의 의미에 대한 혼란 때문이었다. 학생의 세계에서 회사원의 세계로 건너가는 일은 내가 가진 세계관과 삶에 대한 인식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인생이란 원래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게 의미 있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이상이 있다. 바로 자아실현의 이상이다. 더 이상 우리는 옛날 사람들처럼 신의 뜻이나 성현의 말씀을 추구하지는 않고 그 대신 꿈, 모험, 창조, 성장 같은 자아실현의 이상을 추구한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스스로를 표현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해가길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학생 시절 우리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살아왔다. 자아실현이라는 이상과 매일의 삶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원은 달랐다. 출근은 하루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고 우리는 매일매일의 빛나는 낮 시간을 떼내어 남의 일을 하는데 썼다. 근무시간만큼은 주어진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개인의 성장과 발전은 부차적일 뿐이었다. 매일의 삶 한가운데 내 것이 아닌 시간이 자리 잡았고, 나는 마치 이물질을 삼킨 조개처럼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오래 혼란스러워했다. 그렇게 회사원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의미의 우주를 느리지만 확실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별자리에는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중세의 하늘은 신성으로 가득 찬 의미의 우주였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며 하늘에서 신은 사라졌다. 신성이 걷힌 텅 빈 하늘을 배경으로 과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생에서 회사원이 되는 일도 내게는 일종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건이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바뀌며 한때 우주의 중심이던 지구가 태양의 변방으로 자리를 옮겼듯이, 회사원이 되는 일도 내게는 자아의 자리와 의미의 우주를 뒤흔드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과 삶이 분리된 이 새로운 세계 앞에서 공허함과 해방감을 함께 느꼈다. 그 옛날 신성이 사라진 텅 빈 우주를 바라보며 느꼈을 근대의 사람들과 비슷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