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게 다인 줄 알았던 나에게
지금껏 건강 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다. 무식한 행위인 줄 안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검진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졸업 후 늘 프리랜서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검진을 받기 위한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다 이대로 간다’는 마음으로 웬만큼 아픈 것은 끙끙 앓고 넘어갔으니까.
어머니는 빚으로 우리를 키웠다. 빚내어 밥 먹이고, 빚내어 옷 입혔다. 아버지의 월급날, 아버지가 미리 당겨 쓴 노름 자금 외에 쥐꼬리만 한 돈으로 외상값을 갚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이너스 재정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지 않기 위해 더욱 간절히 신을 의지하는 것. 그래야 죽지 않으니까. 불쌍한 어머니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순 없었으니까.
화요일 멀쩡히 수업 잘하고 와서 배를 누가 훅 하고 때리듯 충격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밤새 진통은 계속되고 허리를 펴기도 바로 눕기도 힘들었다. 다른 수업을 미루면서 며칠을 집에서 소염진통제를 먹었는데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토요일 새벽까지 아픔은 끝이 없고 이건 단순한 생리통이나 복통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열이 38도가 넘어요. 고열이라 못 들어갑니다.”
병원 입구에서 보호복을 입고 열 체크를 하던 간호사가 가로막았다. 이 시국에 이 정도 열이면 무슨 사단이 났을 수도 있다. 물론 난 위험 지역에 간 적도 없고, 호흡기 질환도 없었다. 열이 그토록 나는 줄도 몰랐고 그저 배가 심하게 아팠을 따름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의료진들은 어떤 위험 사항에서도 철저히 환자를 환자로만 대한다는 거였다. 그들의 직업의식에 놀라고 있을 즈음, 응급실 간호사들이 와서 먼저 검사를 위해 사진을 찍고 링거를 꽂아주었다.
‘혹시 몸속에 돌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있으니, 담당 선생님이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맹장이 터졌어요. 수술해야 돼요.”
이 병원은 외과가 없어 자신이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수술을 하려면 코로나 검사해서 음성이 떠야 한단다. 정신이 아득했다. 수술이라니. 바로 수술이라니.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뒤로하고 엠블런스로 수술할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입원했던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엠블런스를 탔던 경험이 있기에 이게 다 돈인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병원을 옮겨 격리된 채 코로나 검사를 하고 기다렸다. 설마 아니겠지? 다행이 코로나는 아니었다.
“음성 나와서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 따위는 없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정을 그대로 온몸으로 따라가는 수밖에.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로 바로 들어갔다.
“패치 붙이면 조금 따끔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보다 더 아픈 배.
“무통 주사 맞으시겠습니까? 이건 비급여라 한 십만 원 정도 듭니다.”
간호사의 말에 당연히 “예쓰!”
그리고 일반 병실로 끌려와 일주일 병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80대 고령의 나이로 맹장 수술을 한 선배 할머니의 다정한 인사와 함께 병실 인연이 애틋해지고. 밤마다 앉고 일어설 때마다 허리에선 불이 나고 제대로 자지 못한 밤들.
화장실 오가는 것, 소변과 대변을 다시 보는 것, 머리를 감는 것, 음식을 넘기는 것 따위. 난 새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하는 아기가 되어있었다. 그 곁에서 귀찮아하지 않고 화장실 갈 때마다, 밥 먹을 때마다 도와준 어머니와 동생. 가족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싫은 소리 한번 안 내고 다 받아주는 혈육의 고마움에 그동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과 감정들이 밀려왔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웃으며 손을 내미는, 마치 요양보호사 같던 어머니의 유쾌함도 놀랍고 배우고 싶었다. 가끔 혼자서 수술받고 입원해서 지내다 퇴원하는 분들도 있었다.
‘참 많이 외롭겠다.’
안타깝고 안쓰럽던 순간들.
오전 7시 반, 12시, 오후 5시 반.
일정한 시각에 죽이 나오고 점차 음식이 들어가는 횟수와 양이 많아졌다.
코로나 대비를 위해 환자와 보호자 외에는 절대 면회 금지. 놀이동산 마냥 손목에 팔찌 차고 엄격하게 통제하는 병원 시스템이 놀랍고 고마웠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무통 주사의 부작용으로 어지러워 무통 주사를 닫고 링거를 위한 주사를 꽂기 싫어 퇴원을 요청했다.
어머니 말로 나랑 같은 나이라던 담당 의사와 친절한 응대로 피드백을 해준 간호사들. 중간 아무도 없는 병실에 와서 기도를 해주고 가신 수녀님까지. 모든 것이 계획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일상이었지만, 난 살았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학원 일정도 빠듯한데 걱정해주며 대신 수업을 맡아준 원장 샘과 다른 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자신에게 들어온 목돈 중 일부를 아낌없이 보내준 선교사 언니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카카오페이로 돈을 보내준 지인. 병원 면회가 금지라 집 앞에 퇴원 축하 꽃다발과 마스크를 놓고 간 천사. 달력과 잡곡쌀, 양말, 핸드크림, 손소독제, 립밤 등 한 상자 가득 택배를 보내준 개척 교회를 운영하는 지인까지.
2020년 다시 태어난, 내 생애 최고의 해!
모든 것이 그저 기적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