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사람에게조차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은 잘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잊고 싶은 것들을 품고 슬픔과 우울에 젖을 때마다 기어서라도 나가 걸었다.
걷다 눈물이 나면 울면서 걷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하염없이 걸었다. 벚꽃이 아름다워도 투명 비닐막에라도 쌓인 듯 어여쁜 세상과 나는 동떨어져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오고 단풍이 들어 떨어진 낙엽을 밟아도 가을인가 보다하며 습관적으로 얇은 옷에서 두꺼운 옷으로 바꿔 입으며 그날이 그날인 듯 살았다.
걷지 않는 날은 침대 속의 내가 땅으로 꺼지는 듯했고 걷는 날은 조금 나았다.
햇볕을 쐬면 좋다는데 몸이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아 겨우 일으켰을 때는 저녁이 훌쩍 지나있는 날이 많았다.
어떤 날은 지나치게 많이 먹고 어떤 날은 지나치게 적게 먹었다. 반사된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는 그런 모습을 하며 걷기도 했고 무표정하게 걷다가 얼굴 앞에 다가온 나무 잎새에 놀라 길을 비켜가며 걷기도 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벤치에 앉아도 보고 유모차에 탄 아이가 귀여워 바라보며 걷기도 했다.
열심히 너스레 떨며 장사하는 상인을 보며 재미나는 세상도 구경했다.
적게 자고도 잠이 안 와서 멀뚱 거리 거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늘어지는 시계처럼 계속해서 자고 또 잤다.
무너지는 일상을 이성으로 붙잡고 일어서서 또 일어서고.
그러다 무기력이 길어지고 또 깊어지면 걷고 걸었다.
낮이고 밤이고 걷다 보면 다리가 아파오고 생각이 떠돌다 멈추고 또다시 솟아났다. 그러다 지친 몸에서 떠나가기도 했다. 머릿속이 쉬질 못해서 나의 몸을 들들 볶아대고 나서야 지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