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하, 「침착하게 사랑하기」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 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모든 종교의 가장 기초적인 가르침은 사랑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고 더불어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지 않나. 불교에서는 자비심이라는 덕목을 들어 사랑과 연민을 함께 행하라고 가르치지 않나.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해 온 종교는 때때로 인간이 인간을 탄압하고, 죽고 죽이는 그럴싸한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한 어떤 성향의 개인들에게 억압이 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아무리 목청 높여서 외친다고 해도, 종종 그 가르침은 누군가의 목구멍을 막기도 한다.
신의 사랑은 공평무사하고 끝이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신의 사랑이 폭력처럼 다가오는 자들이 있는 법이다. 시 속의 화자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고, 결국 신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손을 잡고 강변을 거니는 연인처럼 저를 사랑하세요?’
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자, 화자는 따지듯 묻는다.
‘저만 사랑하시는 게 아닌데,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건가요?’
이 대화에서 신의 사랑과는 다른 인간의 사랑을 바라는 화자의 태도가 엿보인다. 신이 대답하듯이 신이 행하는 사랑은 모두에게 동등하다. 이를 ‘보편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개개인에게는 적합한 사랑의 방식이 따로 있는 법이고, 그런 건 ‘개별적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개별적 성향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사랑의 방식은 강요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개별적 사랑’에 가깝다. 현대에 정립된 연애의 개념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만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 그런 전제를 깔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통상적인 개념의 연애는 그 전제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후, 신과 화자를 지켜보던 연인들이 멀어지자 신은 나를 때린다. 무거운 천을, 예컨대 이불을 두르고 때리면 아프지만 멍이 들지 않는다. 이건 질 나쁜 부모나 학생들이 자녀나 또래 학생들을 때릴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종교가 행하는 폭력의 한 은유처럼 다가온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행하는 테러와 살육은 이 범주가 아니다. 어떤 억압은 가정에서 위탁받아 대행된다.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맹신하는 사이비에 의해 희생되는 뉴스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용돈을 끊거나 때로는 폭언과 손찌검으로 행해진다. 요즘에야 사정이 나아졌다지만, 가정에서의 아동 폭력을 훈육의 차원에서 관대하게 다루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그리고 대체로 이런 억압은 가정 밖의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랑은 불에 가깝다. 한순간에 타오르고, 뜨겁고, 자기 자신을 다 태울 때까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불은 침착하지 않다. 즉흥적이고 탐욕스러우며 게걸스럽게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침착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신이 사랑에 대해서 침착하게 말한다. 화자는 그걸 듣지만 ‘개별적 사랑’을 원하는 화자에겐 공염불에 가깝다. 제목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왜 ‘침착하게 사랑’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다툼 이후에 수반될 고통에 대해서 예감한 듯한 화자의 태도에서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의 사랑을 화자는 거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그런 신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이 침착한 사랑의 방향은 ‘보편적 사랑’을 행하는 신에게서 화자에게로, 그러나 이내 화자에게서 신으로 전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별적 사랑’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이해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침착한 태도를 견지하는 일. ‘침착하게 사랑하기’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화자가 만들어낸 자기 보호법일지도 모른다.
부기
개인적으로 문학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실제 삶을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품 안에서만 고민할 때는 해석되지 않던 의미들이 작품 밖 작가의 삶과 맞물리면 절묘하게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 언제나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작품이 오로지 작품으로만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도하의 시 앞에선 나는 위 명제를 잘 지키지 못한다. 차도하 시인은 유고 시집 『미래의 손』을 출간하기 전에 에세이집인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을 냈다. 이 에세이집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이 적은 솔직한 에세이라니. 개중에서도 내 마음을 오래 붙잡고 있던 페이지들은 잘 살고 싶다는 절규에 가까운 다짐들이 적힌 부분이었다. 그곳에서나마 시인이 부디 평안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