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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어, 비록 억지라고 해도.

나태주, 「꽃그늘」

by 고전파 Feb 26. 2025

나태주, 「꽃그늘」




아이한테 물었다

 

이 담에 나 죽으면

찾아와 울어줄 거지?


대답대신 아이는

눈물 고인 두 눈을 보여주었다.













          이 짧은 시 안에서 꽃그늘이라는 제목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인이 밝힌 뒷 이야기에서나마 그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급뉴스 기사: 나태주-"나의 시 '꽃그늘' 이렇게 썼다")


          나태주 시인은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편도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썼다고 고백한다. 카잔차키스는 해변에서 춤을 추며 끝나는 결말이 인상적인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이기도 하다.



「편도나무」, 니코스 카잔차키스

어느 날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하였네
간절히
온 마음과 기쁨
그리고 믿음으로

편도나무여
나에게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그러자 편도나무는 활짝
꽃을 피웠네.



          위 시의 화자는 편도나무에게 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한다. 편도나무는 그 응답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짐작해 보건대, 만개한 꽃이 곧 신의 이야기일 것이고, 이것은 생명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너희 피조물들이야말로 신이 사랑을 담아 창조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편도나무가 피워낸 꽃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꽃이 만들어낸 그늘을 밟고 선 채로. 그리고 자신만의 시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탄생한 시는 '꽃그늘'이라는 제목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와 언어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 장인(匠人)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이 시인은 거대한 창조신화를 자신의 내밀한 비밀로 바꿔내는데 어김없이 성공한다. 신이 빚은 생명과 사랑에 대한 서사는 개인적인 내면의 고백으로 아름답게 탈바꿈한다.












          실제 시인의 경험담은 또래 남녀 간의 발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아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둘 사이에는 물리적인 세월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정한 애칭일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뜻을 따라가보자.


           이 시의 2연은 인상적이다. '이 담에 나 죽으면 찾아와 울어줄 거지?'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전부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인간의 생에서 '아이'의 시절은 죽음과 거리가 멀다. 아이에게 죽음은 아직 감각되지 않고 아득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밝혔듯이 이 물음은 협박에 가깝다. 화자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만, 은연중에 잊고 사는 죽음에 대해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생명의 충만함을 만끽하기도 모자를 아이에게 부러 두려움을 각인시키는 행위다.


          왜 차라리 지금 당장 내게 웃어달라고 부탁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차라리 꼭 찾아와서 울어달라고 부탁하지 못하는가. 시 속의 물음은 이러한 부탁보다도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 있다. 죽음 뒤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어째서 겨우 이런 위악적인 물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 부탁과 물음 사이만큼의 거리를 뻔하게 상상해 보자. 상대방의 옆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화자와 아이의 관계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어서 지친 화자는 아이의 진심을 확인받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벌어진 거리 안에서 시 속의 물음은 차라리 은밀한 진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비록 이 말이 억지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협박이나 억지 같은 위악으로 포장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방식이 옳다고 할 수만은 없지만 그런 사랑도 존재하는 법이다.


         이제 위악스러운 물음으로 포장된 이 형편없는 고백에 대한 아이의 대답을 살펴보자. 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두 눈에 고인 눈물을 보여준다. 화자의 죽음을 불현듯 인식하고 흘리는 눈물일까. 그렇다면 아이는 화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죽음이 두려운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는 화자의 투박한 고백을 알아들었음에도 이를 받아줄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시인은 절묘하게 여기에서 이 시를 끝낸다. 우리는 아이의 진심을 알 수 없다. 다만 아이가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또한 화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억지스러운 진심의 고백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는 우리의 상상으로 완성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는 종종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들을 말하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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