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비행의 추억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으니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의 손을 꼭 잡으며 할머니는 신신당부했다. 신학자이자 성직자인 아빠를 두었다는 건, 나 또한 작은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누군가 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마저 내어주는 게 마땅했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빗겨 난 날엔 “목사님 딸이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가중처벌이 내려졌다.
걸스카우트 소녀의 가슴에 하나둘 늘어가는 배지처럼,
이 땅에서의 체류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를 규정하는 수식어들도 늘어만 갔다.
가고 싶고 가지고 싶고 먹고 싶어도 “저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연발하던 내게 어떤 바람이 분 걸까. 갑작스레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아빠를 언니 둘이 따라간다는 결정 앞에서 나는 나를 위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나도 데려가요!”
당황한 부모님은 미국유학 명단에 급하게 나를 추가하고 본격적인 출국준비를 시작했다.
집이 부유하다거나 오랫동안 미국 갈 준비해왔다거나 하는 전조증상은 없었다.
예상밖 인물의 조기 유학 소식에 학교는 들썩였다.
“너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떡하려 그래?”
“네가 가버리면 희준오빠는 누가 지키니?”
“미국 가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 잔뜩 보내줘!”
꿈처럼 멀게 느껴지던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엄마는 지퍼를 열수록 키가 커지는 이민 가방을 꺼냈다.
세 자매의 짐을 이리저리 넣고 빼면서 빈틈없이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학교에 매고 다니던 빨간 배낭 뚜껑을 열어 나의 한국을 담았다.
비행기에서 읽으라는 단짝친구의 편지 상자가 찌그러지지 않게 뽁뽁이로 소중히 감싸 넣었다.
가방 측면 지퍼에는 나의 미국행을 슬퍼하던 같은 반 남자아이가 선물해 준 “I love you.” 소리가 나는
오리 인형을 달았다.
투명 주머니 처리된 배낭 등판에는 나의 최애 가수 책받침을 넣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H.O.T의 리더 문희준을 등에 업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새로 산 연청색 오버롤 치마에
동요대회에 나갔을 때 맞춰 입었던 흰 티셔츠,
그리고 남색 통굽 운동화로 완성한 만 열두 살 공항룩으로 일생일대의 여정을 시작했다.
제주도는커녕 국내 여행 경험도 많지 않은 나의 첫 비행 목적지가 미국이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빠는 이미 미국에 나가 있었고 엄마는 동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미성년자 세 명의 셀프 출국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빠가 우리에게 보내온 길고 긴 국제 팩스엔
비행기 안에서부터 입국심사까지의 행동요령이 분단위로 담겨있었으니까.
그래서 설명서를 열심히 예습했느냐고?
그건 아니지만 두툼한 팩스뭉치는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비행기로 이어지는 탑승 통로를 따라 걸을 때 TV광고에서 보던 승무원 언니들을 떠올렸다.
화사하게 화장한 얼굴, 잔머리 한 톨 없이 단정히 말아 올린 머리, 밝은 블라우스와 치마 차림의 젊고 상냥한 여성들 말이다.
그러나 도착한 기내입구에서는 예상과는 다른 여유 있는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Welcome to Delta Airlines.”
엄마의 또래이거나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안내하며 기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인종, 키와 체구는 각양각색이었고 자유로운 유니폼과 신발의 형태, 헤어 스타일 역시
‘여긴 미국’을 외치고 있었다. 심지어 친절함의 온도까지도 개별 세팅이었다.
“승무원은 ooo야지.”라는 공식이 무너진 밤을 축하하듯, 생애 첫 기내식이 카트에 실려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0000 or chicken?”
“………”
아빠의 설명서 내용은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치킨’만 들렸다.
바삭하게 튀겨진 KFC 치킨을 떠올리며 씩씩하게 “Chicken!”을 외쳤다.
잠시 후 내 앞에 놓인 그릇의 쿠킹호일을 벗기자 낯선 냄새가 엄습했다.
국물에 침수된 나무(브로콜리)들과 하얗게 질린 치킨(가슴살)이 쓰러져 있었다.
“치킨이라며…”
언니들이 꺼리는 음식마저 잘 먹는 둥글둥글함으로 그간 승부해 온 나지만, 상공에서 맛보는 축축한 치킨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안다고 확신했던 익숙함이 낯선 얼굴로 다가오는 곳, 그게 미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