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계를 깨우다

by 샤인젠틀리

프리틴(10-12세) 시절 미국으로 옮겨진 나는 심기기가 무섭게 다시 뽑히고 이동하기를 반복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흑인이 주를 이루는 지역,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더 자연스러운 지역, 외국인도 외지인도 없는 백인 지역, 한인교민들을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로 컬러풀한 지역까지 다양한 땅들을 경험했다. 찬찬히 살피고 서서히 적응하는 내 성정에 잦은 이동은 무거운 스트레스를 유발했지만 이런 다양한 환경은 내 안에 고요히 살고 있던 편견과 가치에 불을 비추어 주었다. 그것들을 계속 가지고 함께 갈 것인지 내 버릴 것인지 점검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의 의지로 찾아간 영국 땅에서 빨아들인 양분은 대학을 마친 내가 다시 한번 대륙횡단에 도전할 용기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지인이라곤 한 명도 없고 문화도 생소한 유럽에서도 해냈는데 꿈에서도 항상 그리워한 한국, 익숙한 이곳에서 난 다시금 활짝 꽃필 수 있겠지? 나 스스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럼 그렇고 말고.'


미국에선 나의 생김새도 체형도 손끝에서 풍겨 나는 냄새에도 '다름'이 표시되었지만 긴 세월 하나의 언어와 생김새로 역사를 이어온 한국에 서있는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튀지 않는 한 명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걷다 쇼윈도에 비치는 내 모습을 단박에 찾지 못할 만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평범함이 참 좋았다. 그러나 한국인의 외형으로 미국에서의 시간을 내면에 간직한 체 다시 찾은 한국은 새롭게 적응해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한국을 떠난 시점부터 내가 축척한 데이터와 경험들은 미국한정인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 돌아와 펼친 나의 노트는 1/3 정도가 채워진 상태에 멈춰있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노트도 꺼내 살펴보면서 나는 새로운 제3의 노트를 만들어야 했다. 어떤 부분을 계속 이어가도 좋을지 어떤 것을 지워내야 할지 어떤 것을 접목시시킬지 살피고 채워가는 것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했고 낯 뜨거워지는 실수로 가득했다. 어떤 종류의 부끄러움인지 설명해 주는 친구의 일화를 빌려본다.




직관적이지 않아 바로 해석되지 않지만 뭔가 깊은 뜻을 담고 있을 것만 같아 고유한 멋이 느껴지는 현대 미술관의 작품 같은 친구가 자신이 얼마 전 다녀온 어학연수 에피소드를 풍미 있게 들려주었다.


평소 커피 없는 하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녀는 스타벅스의 고장 미국에서 원어민 뺨치는 발음과 억양으로 아메리카노 주문을 당당히 성공시켰다.


“2달러 95센트입니다.”

"음..."

그녀는 동전 지갑 속을 시크하게 내려보다가 다양한 크기의 동전들을 카운터에 촤르르 쏟아놓고 직원을 바라봤다.

“제가 잔돈에 좀 서툴러서...”


친구는 이날의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멀쩡한 도시녀가 순식간에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 된 거 같아 두고두고 이불킥을 했다.



한국에서 관공서에 볼일이 보거나 주변에 경조사가 있을 때,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으로 성장한 사람이라면 숨 쉬듯이 알고 익혔을 상식이나 관례들을 나는 잘 몰랐고 그로 인해 부끄러워지고 난처해지는 경우가 생겼다. 차라리 외모부터 외국인이라면 상대가 마음에 준비를 하고 하나부터 친절하게 안내해 줄 수 있지만 겉모습이 100% 한국인인 나의 모자람이 드러나는 순간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나만큼은 새로운 땅에 심긴 나 자신을 보듬으며 나아가기로 했다. 미국의 나와 한국의 내가 만나서 하모니를 이루는 그날을 그려보면서 말이다. 나의 멈춰버린 시계가 내 속도에 맞춰서 다시 가기 시작했다.




*월요일 연재가 개인사정으로 하루 늦어졌습니다. 기다려주신분들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글을 찾아주시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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