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출생신고로 고유한 이름을 붙여주듯, 책도 출간하기 전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에서 isbn을 발급받는다. isbn은 국내 출판물의 국제표준 도서번호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절차다. 여기에 입력해야 할 필수 항목이 바로 ‘서명’이다. 이 책 제목을 짓기 위해 담당 기획편집자는 골머리를 앓는다. 투고 원고든 기획원고든 상관없이 첫 원고에는 ‘가제’가 붙는데, 저자가 제목을 확정 지었다고 해서, 그 제목 그대로 출간되지 않는다. 출판사와 저자 간 협의를 통해 제목을 정하기전까지는 가제로 부르며 소통한다.
“제목을 어떻게 지어야,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 질문이다. 요즘 트렌트를 따라잡으려 온라인 서점을 눈팅해 본다. 신간 도서의 제목을 보며 어떻게 이런 획기적인 생각을 했을까,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제목 확정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속으로 곱씹는다. 그러다 내 맘속엔 부러움이 남는다. 내 담당인 책이니까 부담감은 곱절. 최근에도 출간 예정인 신간 제목을 정하느라 꽤 오래 애를 먹었다. 저자와 출판사 사이, 서로 의견이 충돌하면 협의를 해야 하는데 그 협의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으리란 걸 너무 잘 안다.
보통은 제목 리스트업을 해서 1차 메일을 저자에게 발송한다. 이후 저자의 의견을 받고 2차로 제목과 부제를 선정하여 추린다. 기획자와 저자가 한마음 한뜻이라면 바로 ok로 제목을 확정하고 표지 시안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메일을 계속 주고받을 때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제목 회의에 들어간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이고 신선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수많은 의견을 정리하다가 오히려 혼란만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제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야 책 판매로 이어지고, 매출이 상승한다. 그래서 그저 그런 평범한 제목, 눈에 띄지 않는 제목, 책의 본질을 벗어난 제목, 유행을 타는 제목, 이미 나온 제목은 최대한 배제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제목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어서, 기획안에 맞춘 핵심 타깃층과 그에 따른 마케팅 방안을 총동원해서 저자에게 어필했다. 유선상으론 해결이 안 되니 메일로 ‘출판사가 정한 제목으로 바꿔야 하는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메일을 보냈다. 드디어 저자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순조롭게 소통하며 진행해왔는데, 표지 시안을 확인한 저자가 자신이 원한 느낌의 표지가 아니라며 수정을 요구해왔고 제목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들쑤셨다. 네? 이제 와서 바꾼다고요? 본인이 알겠다고 하셨잖아요..
역시 출간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책 만드는 보람으로 일하고 있는데, 뜻밖의 이유로 진행에 차질이 생기면 허탈함이 밀려와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다. 그래도 내 책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어 다시 한번 저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저자와 출판사 간 원만한 협의로 일이 척척 진행되면 얼마나 좋을까. 베스트셀러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책을 만들고 싶을 뿐인데… (물론 굳은 의지를 담아 내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
“베스트셀러용 제목은 따로 있을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트렌드에 제목도 시기를 많이 타는 것 같다. 분야마다 내세우는 전략도 다르니 말이다.
에세이: 문장형 제목이 많다. 현시점에서 예스 24 기준 판매량 순으로 살펴보면 1위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손힘찬 저), 2위 <이제는 오해하면 그대로 둔다>(김다슬 저), 3위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장명숙 저) 순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에세이의 특성상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을 많이 사용한다. 주로 은유적인 표현을 쓴 제목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가끔 반어법이나 어그로를 끄는 제목도 종종 보인다.
경제경영: 검색어 노출 키워드가 중요하다. 주식 관련 책이라면 ‘주식’ ‘돈’ ‘비트코인’ 등 핵심 키워드가 제목이나 부제에 명시되어야 한다. 경제경영서는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해 구매하는 독자들이 대부분이므로, 문장형보다는 딱딱 떨어지는 키워드형 제목이 많다. 현시점 예스 24 기준 스테디를 살펴보면 1위 <2030 축의 전환>(마우로 기옌 저/우진하 역), 2위 <돈의 속성>(김승호 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저/안진환 역) 순이다.
인문, 자기계발: 아주 짧은 제목을 쓰기도 하고, 긴 문장의 제목도 있어서 다른 분야에 비해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현시점 예스 24 기준 인문 분야를 판매량 순으로 살펴보면 1위 <장면들>(손석희 저), 2위 <오십에 읽는 논어>(최종엽 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릭 와이너 저/김하현 역) 순이다.
그 밖의 실용도서(건강, 취미, 요리, 여행 등)는 제목에 핵심 키워드를 넣고 부제에 설명을 보충한다. 주제가 명확하기 때문에 제목 짓는 데도 훨씬 수월한 것 같다. 수험서나자격증, 교재는 뚜렷한 독자층이 이미 확보되어 있어서 제목을 짓기 위해 용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팔린다. 과거 수험서를 만들 때 제목 걱정은 1도 하지 않아도 돼서 참 편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인플루언서, 유튜버, 정치인 등 누구나 다 알 법한 유명인이 쓴 책은 내용이 특별하지 않아도 저자의 인지도가 있으니, 적극적인 홍보가 없어도 알아서 책이 팔린다. 그러니 제목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간혹 10만 부 리커버 에디션을 단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오면 부럽다가도, 한편으론 유명인일수록 논란에 휩싸이게 되면 책 판매에도 엄청난 치명타를 입으니 대박 아님 쪽박, 모 아니면 도라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가제목을 대체할 더 좋은 제목안이 딱히 없다면, 변경 없이 가제목을 제목으로 확정하고 가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라고 확신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베스트셀러용 제목에는 정답이 없다. 오늘도 제목의 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편집자의 고뇌가 담긴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