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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날리 Jan 16. 2022

오늘도 다른 사람의 글을 훔쳐봅니다

0순위 독자로 산다는 것

브런치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괜찮은 저자를 물색하는 것이 목표였다. 글 좀 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자연스레 브런치가 떠올랐다. 다른 플랫폼과 달리 작가 신청을 해서 승인을 받아야 글을 쓸 수 있는 브런치는, 편집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괜찮은 글을 발견하면 구독을 눌렀다. 브런치와 출판사의 협업으로 출판 프로젝트도 매년마다 진행하니, 브런치 작가들이 책을 출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


내가 브런치를 통해 저자를 섭외하고 책을 출간한 건 두 번이다.


첫 번째는 육아 관련 실용 책이었다. 우연히 서칭하다 괜찮은 매거진 글을 발견했다. 이 주제로 책을 내면 괜찮겠다 싶었다. 확고한 주제가 있으니, 저자와 피드백을 통해 샘플원고를 주고받고 이후 최종 원고를 받았다. 아무래도 실용 도서다 보니 들어가는 이미지 수가 많았다. 실용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분야이기도 했지만, 텍스트만 있는 글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요소가 많았다. 목차대로 사진 폴더 정리하기, 원고 텍스트에 맞게 사진 배치하기, 사진 내용과 글이 맞는지 대조하기 등등. 단순히 교정교열만 보는 게 아니라 이미지도 함께 관리해야 했다. 심지어 재료 이미지에서 누락된 게 있다면 디자이너에게 누끼를 따서 추가해 달라거나, 반대로 삭제 요청을 한다거나 번거로운 작업이 더러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당시 본문 종이를 ‘백색 모조’로 선택했는데, 책을 받아 보니 실제 원본 색상보다 흐릿하게 나왔다는 것. 심지어 감리까지 봤는데…. 좀 더 신경 써서 종이를 선택할걸. 당시엔 편집자의 종이 선택이 큰 파장을 불러오리란 걸 몰랐었다. 이미지가 많이 들어가는 실용 도서는 모조보다는 뉴플러스나 스노우지가 더 적합하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됐다.


두 번째는 디자이너가 쓴 예술 책이었다. 디자이너 출신이 마케터로 일한다는 내용이 신선했다. 브런치 글이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어찌 됐든 내 기획안은 통과됐다. 하하호호 저자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계약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처음 목차를 잡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땐 즐거웠다. 게다가 원고도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저자가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것. 내가 콘셉트를 잡은 본문 시안은 저자의 기대치에 한껏 못 미쳤기 때문이다. 서로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다. 나는 좀 더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디자인 요소를 넣길 바랐고, 저자는 텍스트 위주의 깔끔한 디자인을 원했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다 책이 못 나오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저자의 의견대로 결국 본문 시안을 새로 잡았다. 당시 디자인 팀장님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본인의 디자인이 통과되지 않고 저자의 의견대로 디자인을 따라야 했으니까. 본문도 이런 난항을 겪었는데, 표지는 어떡하지? 역시나. 표지 작업도 난항을 겪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될까. 2~3안의 표지 시안을 본 저자는 아예 본인이 직접 만든 샘플을 내게 보여주었다. 디자인 팀장님과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냥 제목과 카피 문구로 표지를 만들라고요?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저자는 부제목 없이 제목만 넣어달라고 한 걸 겨우 설득하여 부제를 달고 갈 수 있었다.


디자이너 출신 저자분들이 본인 책의 디자인에 아주 예민하다는 걸 이때 실감하게 됐다. (물론 모든 분들이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아직도 표지 디자인을 보면 미련이 남는다. 지금 작업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때 당시의 나는 설득할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용이 좋아서, 글로 승부를 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온전히 텍스트에 집중했던 것 같다. 작년 세종 도서 교양 부문에 이 책이 선정되면서 나는 내게 남은 미련을 아주 조금은 씻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작업한 과정에 대한 보상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요새는 브런치 말고도 SNS 인플루언서나 유명 유튜버를 섭외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영향력 있는 저자여야 책이 많이 팔릴 것이라는 대부분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저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마케터 아니라 기획편집자라 이런 생각을 아직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하루 세 번, 3분 동안 양치를 하는데, 고작 9분을 들여 양치하는 시간보다 책 읽는 시간이 더 적은 것 같아 슬픈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나도 책을 편식하는 편집자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웃프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먼저 읽는 ‘0순위 독자’로 살면서, 얻은 게 있다. 각자 치열하게 삶을 산다는 것과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것. 나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속이 크게 동요한 적이 많았다. 원고를 읽으며 새로운 분야에 대한 편견이 사그라들기도 했고, 현재 내 삶을 되돌아보며 동기부여를 얻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글을 편집하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면 어떨까, 상상한 적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편집자니까,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다듬는 것도 힘든데 내 글까지?’라며 꿈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편집자들이 하나둘씩 책을 내기 시작하며, 내 생각도 바뀌어갔다.


작년 5월 말 용기를 내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고, 한 번에 통과가 됐다. 그리고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편집자이지만, 브런치에서는 나를 작가로 불러주니 기분이 내심 좋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고, 또 살고 있지만 이제 편집자의 생활 말고도 내 개인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는 내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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