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하자마자 메일을 읽는다. 월요일엔 주말 동안 쌓인 스팸메일을 처리하는데, 그 속에서 저자 메일을 체크한다. 편집장님의 부재로 약 6개월간 임시 팀장 업무를 도맡던 당시, 투고 원고를 읽고 출간 제안과 출간 거절 메일을 보내는 일을 했었다. 원고를 읽는 게 주 업무이건만, 주마다 겹겹이 쌓이는 원고를 보면 숨이 턱 막혔다. ‘언제 다 검토하지?’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게다가 원고를 나누는 일도 버거웠다. 감히 현재의 내 경력으로 원고를 매기고 정하는 일을 해도 되는 걸까? 부담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들었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특히 거절 메일을 보낼 땐 괜스레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다음에 좋은 인연이 되길 희망합니다.”
거절 메일을 보낼 때 적는 멘트 중 하나인데, 오히려 내가 이 멘트를 받을 때도 있다. 그 메일의 발신자는 다름 아닌 여러 출판사의 러브콜을 받은 작가다. “저희와 계약해주세요.” 대면 미팅을 하고 나서 분명 느낌이 좋다가도, 갑자기 싸할 때가 있다. 결국 다른 곳과 계약하셨군. 거절 메일을 받으면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대개 드는 기분은 ‘아쉬움’이다. 투고 원고 중 괜찮은 원고를 발견하면 재빨리 컨택에 들어가야 한다.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고를 보는 출판사의 눈은 다 거기서 거기다(?)란 걸 느꼈다. 기획 원고는 내가 직접 쓴 기획안의 원고를 써 줄 최적의 저자를 찾아 컨택하는 것이니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투고 원고는 다르다. 저자의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더더욱.
글을 쓰니 한 저자와의 미팅이 떠오른다. 여느 날처럼 합정에서 미팅을 했는데 평균 한 시간 정도 걸리지만, 말 많은 저자를 만나는 경우는 예외다(언제 끝날지 모름..) 샘플 원고와 기획안을 토대로 목차를 새로 구성한 기획안을 작성해 갔다. 짧은 시간에 눈에 불을 켜고 준비한 만큼 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저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처음 미팅한 출판사는 대표님이 직접 오셨어요. 매대에 어느 정도 투자할지 마케팅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아, 이럼 안 되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이 앞에서 이런 얘길 듣고 있으니,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계약 조건이 비슷하다고 가정할 때, 저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줄 출판사에 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저자가 원하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1차 카페, 2차 식사자리에서 원고에 관한 얘기를 하며,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헤어질 땐 덤으로 간식도 받았다. 부서 사람들과 간식을 나눠 먹을 땐 기분이 정말 좋았는데. 이미 저자는 계약할 출판사를 속으로 결정했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간식 선물을 준 게 아니었을까? 긴가민가한 내 생각은 저자의 거절 메일을 받고 나서 확고해졌다.
아쉽게 인연이 닿진 않았지만, 이왕이면 좋은 책을 출간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회신을 보냈다.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나길 기대한다는 말과 함께. 이후 기억이 까마득해질 때쯤, 우연히 온라인 서점에서 저자의 책을 발견했다. 다른 편집자의 손을 거쳐간 책은 늘 궁금하다. 이건 편집자의 공통된 마음일 터. 그런데 표지를 보고 살짝 놀랐다. 좀 더 콘셉트를 살렸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콘셉트와 많이 달랐으며, 목차도 처음 기획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작업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편집자들도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 같다.
하나의 원고가 어느 편집자(+디자이너, 마케터를 포함한 출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새로운 글과 디자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만약 내가 담당한 원고를 A 디자이너가 아닌, B 디자이너가 맡았다면 어떤 표지와 내지 디자인이 나왔을지 종종 상상해 본다. 나는 내가 맡은 원고, 내 기획안으로 직접 저자 섭외를 통해 계약한 저자와는 새로운 인연을 맺는 거라고 생각한다.
거북목 자세로 사무실에 갇혀 일하기보다는 가끔은 바깥공기를 쐐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일이 바쁘지 않을 때 저자 미팅이 생기면 외출할 수 있어서 신이 난다. 미팅이 끝나면 들릴 빵집을 알아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달력에 미팅 날짜를 기록해둔다. 모든 편집자가 정적인 활동만 원한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enfp 편집자의 개인적인 생각).
돈이 묶인 계약이니 어찌 보면 비즈니스적인 관계이지만, 출간이라는 목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관계가 끝난다고 여기지 않는다. 요즘은 편집자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1인 출판사를 차리기도 하는데, 기존에 인연을 맺은 저자와 프로젝트 작업을 하기도 한다. 편집자와 작가가 함께 출판사를 차리거나, 작가가 출판사를 만들어 자신의 책을 내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개인 SNS나 이메일로 저자분들의 감사 메시지를 전달받을 때 책을 만드는 보람을 느낀다. 일하면서 회의감이 들어 이따금씩 퇴사 욕구가 생겼다가도,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독자의 후기를 볼 때 동기부여를 얻는 것 같다. 올해 있었던 일 중에선 내가 담당한 에세이 책이 대만 번역서로 나온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회사에서 수출한 책은 처음이라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보통 판권 문의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좋은 책은 국경을 넘어서도 그 가치가 전해지나 보다.
어제는 내가 기획편집을 담당한 도서 두 권이 <2021년 세종 도서 교양 부문(사회, 예술)>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인증마크를 단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현재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웹툰 단행본에 뛰어들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생소한 일들이 많았는데, 관심 있는 분야라 더 잘 만들고 싶은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 좋은 책을 만들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원고를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