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만난 베트남
당신은 여행을 다녀온 후 무엇을 하는지. 여행지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여운을 안은 채 일과를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곳에서의 일들과 일상을 비교할지도 모른다. 쌀국수가 정말 끝내줬지. 거기에선 이천원이면 됐는데, 8천원을 내고 조미료육수로 끓인 쌀국수를 먹어야한다니. 화장실은 정말 곤욕이었지. 특히 기차의 화장실칸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투덜대고 또 그리워하던 순간들은 일상에 희미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잊혀진다. 아주 가끔 어느 한 순간 그 순간들이 겹쳐지듯 떠올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화창하던 그곳의 어떤 풍경이. 그곳에서 맡았던 이국적인 조미료 냄새가. 낯설면서도 편안하던 이국의 언어가. 다시 사진들을 뒤적이고 한 번 더 떠나볼까 계획을 해보기도 하지만 시간은 빠듯하고 돈도 부족하다.
나는 그럴 때 여행갔던 그 곳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는다. 그곳을 다루는 책일 것. 그곳의 역사적인 맥락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일 것.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고 다양한 관점들을 배제하지 않고 드러내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저자일 것. 이 조건들을 갖춘 책을 내가 경험했던 여행의 순간들을 복기하면서 천천히 읽어내려간다. 그러다보면 내가 머물렀던 곳들은, 이전의 역사적인 순간들이 누적된 그곳으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상은,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단면으로, 되살아나고, 복기하던 순간들은 더욱 입체적으로 되살아나 곱씹어 보게 한다. 그곳에서의 순간들은 다시금 그들을, 비교하여 나를 돌아보게 한다.
베트남에서 돌아와서는, 곧바로 호치민평전을 찾았다. 호치민. 베트남의 독립과 공산화의 주인공. 전설적인 베트남독립운동가이자 코민테른의 일원. 소련과 중국, 미국의 지도자들과 팽팽한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걸출한 지도자. 베트남전쟁을 기어이 승리로 완성해 남베트남을 통일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공산당의 제1서기관. 베트남 제1의 경제도시 사이공의 바뀐 이름. 베트남지폐의 가운데에 박힌 얼굴. 베트남공산당의 절대적인 상징. 호치민, 베트남을 대표하는 그 이름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 본문의 사진은 구글의 이미지검색과 베트남여행에서 직접 찍은 것들
출판된 여러권의 책들을 비교하다가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으로 걸러낸 책은 윌리엄 듀이커의 평전이었다. 그는 1960년대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일을 하다가 북베트남의 끈질긴 투쟁에 주목했고 호치민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년 동안 자료를 모아 결국 그의 평전을 완성했다. 그는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많은 나라들에서 찾아낸 온갖 종류의 서류들을 바탕으로 972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로 호치민의 삶을 재구성해냈다.
듀이커의 글을 따라, 그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호치민의 삶은 치열하다. 그는 조세운동으로 프랑스에 저항한 젊은 독립운동가였고 일치감치 프랑스에 쫓겨 베트남을 떠나야 했으며 여객선에서 주방보조를 하며 세계곳곳의 식민지를 그의 두눈으로 보고 직접 겪었다.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배웠고 수많은 글과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나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나에게 역사, 사회과학, 심지어 군사과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엇을 경멸할 것인가 우리 베트남인에겐 독립, 노동, 조국애가 필요합니다.”
프랑스에서의 호치민, 그는 프랑스의 사회당에 입당해서 활동했고 후에는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영향을 받아 코민테른 지지, 프랑스 사회당에서 나와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중국으로 넘어가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대표가 되고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얻는다. 그러나 베트남의 분단과 전쟁, 협상결렬과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과의 베트남전쟁으로 길고 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베트남어: Bác Hồ/ 伯胡 박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죽었을 때 남긴 것은 옷 몇 벌과 낡은 구두뿐이었다. ... 1966년 7월 17일 그가 발표한 성명서 가운데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B0%8C%EB%AF%BC\
그는 1969년 아직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윌리엄 듀이커가 착실하게 모은 자료들로 드러난 그의 행보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정치적인 선택들은 그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었고 1973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입성하기까지 그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의 의자와 국제주의자의 의자 어느 곳에 앉겠느냐”는 스탈린의 질문에 “두 곳에 함께 앉겠다”고 답한 지혜는 그 이전의 수없이 많은 일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는 외교적인 협상의 힘을, 연설과 글의 힘을 알고 있었던 이였고 그의 수많은 연설과 글은 그의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남아있었다. 역사적 사실들과 그의 생이 남긴 기록들을 씨실과 날실을 엮듯 엮어낸 글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하노이가 기억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햇살 아래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정원과 그 앞에 고즈넉하던 의자와 테이블이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숨죽이고 들여다보던 그의 집무실과 그의 침실 그리고 그 아래 말끔히 차려입은 군인들이 엄숙하게 지키고 있던 자리들이 떠오른다. 그곳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글을 읽고 또 자신의 글을 써내려가던 호치민을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 호치민이 떠오른다. 아름답던 인민위원회 건물로 땅거미가 내리고 그 앞의 호치민의 동상을 에워싼 관광객의 물결이 기억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들이 그곳에서 웅성거리며 해가 지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나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사진에 담던 그 순간. 그 풍광은 내 마음 속에 호치민평전과 함께 더욱 특별하게 되새겨진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3/03/009100003200303281836761.html
http://news.joins.com/article/144119
다른 이들은 호치민 평전을 어떻게 읽을까. 한겨레 기자와 중앙일보 기자의 시선을 나의 읽기와 비교해보며 다시금 호치민을 그리고 베트남을 생각해본다. 당시의 우리나라를 떠올려보면, 호치민은 우리나라의 김구와 김원봉을 합쳐놓은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가늠해보기도 하고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가 달라졌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베트남은 이전에 막연하던 순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그와 더불어 베트남 여행은 한 번 더 내 마음 속에 새겨진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바람과 기대로 새로운 여행을 꿈꾸게 된다. 그렇다. 여행의 끝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