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멜버른
고등학교 졸업여행 전까지 비행기라곤 타보지도 못했던 내가 스무 살 넘어서는 비행기 타는 여행을 몇 차례나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공항이 주는 설렘과 특유의 산만함이 좋아서 출발 5시간 전에는 도착하는 여유를 부렸는데, 이번 멜버른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홍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선물해준 형광 핑크색 백팩에 5일 치의 짐을 쑤셔 넣고는 트레인으로 40분가량을 이동하여 시드니공항 국내선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수월했던 비행 수속을 빠르게 마친 후 게이트까지 걸어가며 낯설고도 익숙한 그 공기에 나도 모르게 처음 시드니로 입국하였을 때가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고작 2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에 심지어 호주 내에서 고작 다른 주로 이동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다른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레었다. 그 이유는 호주처럼 넓은 나라들은 각 주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와도 같다는 지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시 영어로 말하는 삶이 꽤 익숙해진 터라 마치 처음으로 영어권 나라에 온 사람처럼 긴장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늦은 밤 도착하여 빗속을 뚫고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 역시 내심 걱정이 되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린 후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하기 전만 해도 꽤 밝았던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고, 멜버른에 도착하자마자 설상가상 비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을 전혀 찾아보지 않은 나는 그제야 부랴부랴 검색하여 스카이버스 티켓을 구입하였고, 숙소까지 가는 동안 엄마와 짧은 통화를 마친 후 YHA Melbourne Central에 도착하였다. 다소 좁은 4인실에서는 영국에서 여행 온 두 친구와 나와 같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이제 막 멜버른 생활을 시작한 말레이시아인 한 명이 묵고 있었는데, 꽤 살갑게 맞이했던 룸메이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여행 일정이 워낙 빡빡하여 친해질 기회가 부족했다. 그것은 가보고 싶은 웬만한 모든 곳들을 다 가보았다고 자부하는 나의 멜버른 여행 중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사실 여행을 떠날 즈음 워홀러로서 새로운 사람들과 알아가는 것에 퍽 지쳐있었고, 이곳에서 스쳐가는 인연들을 워낙 많이 만나다 보니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크게 관심을 주지 않게 되었다. 인간관계가 때로는 일처럼 느껴졌고, 그 일을 여행까지 와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상투적인 자기소개를 마친 뒤 작은 봉투에 목욕 짐을 꾸려 씻은 후 비행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자 평안이 찾아왔다. 처음 유럽여행을 떠나 런던에 도착한 그날과도 같은 풍경이었지만, 그때보다는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다. 반년이 넘는 시드니생활이 주는 몇 개의 장점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