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30 / 나의 오랜 친구 월레스와 그로밋

멜버른, City Tour (2)

by 사서 유

동년배 친구들이 달에는 토끼가 산다고 믿고 있던 시절, 월레스와 그로밋은 나에게 달은 치즈로 이루어졌다는 영국설화를 믿게 만들었다. 괴짜 발명가 월레스와 그의 든든한 친구이자 반려견인 그로밋은 다소 투박해 보이는 주황색 우주선을 타고 돌연 달로 날아가 버린다. 지하실에서 다소 소동을 부린 뒤 화려한 외출을 떠난 월레스는 그곳에서 크래커 위에 치즈를 바르듯 달을 바른다. 그리곤 크래커를 한 아름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어찌 그 모습을 보고 수많은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달은 나에게 우주선이 개발되고서야 갈 수 있는 미지의 땅이 아닌 괴짜 발명가를 만나면 한번 즈음 크래커 위에 발라 먹을 수 있는 거대한 치즈 덩어리가 되었다.


십수 년이 흘러 우연치 않게 멜버른에서 월레스와 그로밋을 제작한 Aardman사의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외국에서 처음 보는 전시회가 내가 사랑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제작사의 제작기를 다루었다는 사실이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일생을 전시회라고는 두어 번 경험한 것이 전부였던 나는 이 날 이후로 호주를 여행하며 두 번의 전시회를 더 보게 되었다. 물론 언어의 장벽으로 모든 설명을 해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내용을 유추해야만 했지만.


평소 식도락 여행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지라 여행지에서 굳이 맛집을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이번 멜버른 여행은 남들이 다 가보는 맛집을 가보자 하는 다짐으로 맛집 리스트를 뽑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검색된 곳은 시내 모처에 위치한 베트남 음식점 '포보가 메콩'이었는데, 한창 점심시간에 도착해서인지 식당 안엔 사람들은 즐비하게 서있었고 혼자 온 다른 손님과 함께 간신히 겸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양지 쌀국수에 월남쌈을 무려 4개나 시킬 심산이었지만 직원분의 배려로 먹을 만큼만 주문하게 되었고 그렇게 홀로 쌀국수를 음미하며 첫 끼를 때웠다. 한국에서 먹은 쌀국수에 비하여 면발이 두꺼웠고 고기 양이 많아 내 입맛에는 꽤 잘 맞았지만, 후에 멜버른에 살았던 도연이에게서 그 집이 꽤나 맛없기로 유명하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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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0-50-53.jpg Pho Bo Ga Mekong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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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0-58-31.jpg Elizabeth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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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00-13.jpg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Flinders Street Station)

그렇게 배부르게 한 끼를 해결하고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Aardman사의 전시회를 보고자 acmi로 향했다. 누가 호주의 유럽이 아니랄까 봐 햇살마저 눈부셨던 그날의 거리는 건물 하나하나가 마치 그림과도 같았고 마치 그리스신전과도 같았던 H&M을 지나자 연노란색의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이 연노랑빛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비록 공사로 인하여 측면을 모두 볼 수 없었지만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세계 건축 100위 안에 드는 건물답게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은 화창한 날씨와 함께 더불어 빛났고, 내가 멜버른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실감낙 했다. 그렇게 나는 전시회를 본다는 명분을 잠시 잊은 채 커다란 역을 한 컷에 담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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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02-53.jpg 호주 영상 박물관 acmi (Australian Centre for the Moving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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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10-36.jpg Aardman사 전시회 내부

직원에게 조심스레 표를 내밀자 외국에서 처음 보는 전시회이면서 어릴 적 내 친구였던 월레스와 그로밋을 만나는 시간이 도래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몹시 설레어 어쩔 줄 몰라하며 전시장 입구에 조심히 들어섰다. 다음 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그곳에서 3시간이나 소비하는 사치를 누렸다. 평일이었던 탓에 관람객이 적어 한적하였고, 어떻게 해서든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해석하려 노력하였으며, 사진을 정성스레 찍으며 한 바퀴를 다 돈 뒤에야 전시 작품들을 다시 하나하나 감상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나는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운 나머지 미처 세세하게 보지 못했던 전시품들을 찾아 한 번 더 눈에 담은 후 클레이 애니메이션 체험을 해보느라 초저녁이 되어서야 acmi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간 전시회라고는 한국에서 주말에 사람들 사이에 치여 내가 전시회를 보는 것인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었던 퓰리처상 사진전과 평소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언니들과 좋은 시간이 될 듯하여 따라간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회가 전부였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사의 작품이 한가득 전시되어 있는 장소에 오자 몸 둘 바를 몰라하였다. 사진으로 다 담지도 못하였던 월레스와 그로밋의 실제 세트와 어린 시절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화려한 외출'편에 등장한 우주선을 내 눈으로 보는 순간, 나는 금방이라도 달이 치즈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실 홀로 떠난 외국여행에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전시회를 보았다는 사실이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왔고, 전시회야말로 기회가 닿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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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시회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머물렀던 나는 MD샵에서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져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래도 정녕 사지 않을 거야?'라며 귀여움을 뽐내고 있는 각종 상품들 사이에서 75불짜리 도록과 45불짜리 맥그로우 인형에서 갈등하던 나는 결국 사악한 가격에 인형을 내려놓고 acmi를 빠져나왔다. 여담으로 나는 그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동대문 DDP에서 열린 동일한 전시회 기념품샵에서 그때의 한을 풀 듯이 도록을 포함하여 5만 원가량을 소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로우 인형은 끝끝내 마음속에 남아 누군가 멜버른으로 여행을 간다면 반드시 들려 저 인형을 사달라고 부탁하고픈 심정이 들었다. 도록이야말로 acmi에서 판매한 것이 표지부터 시작하여 완성된 퀄리티를 보여주었지만 사실 한글로 해석되어있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더군다나 제본의 차이로 50불이나 차이 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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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15-20.jpg 페러데이션 광장 (Federation 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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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18-02.jpg Melbourne Town Hall
2017-11-30-01-16-27.jpg Block Arcade Studios
2017-11-30-01-17-16.jpg Hopetoun Tea Rooms

이 날은 전시회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음에도 하나라도 더 둘러보자는 마음으로 양껏 돌아다녔다. 이후 그림과도 같은 타운홀을 뒤로하고 멜버른의 100년 된 카페인 홉툰티룸을 방문하였다. 워낙 유명한 카페여서 그런지 사람들은 저녁시간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었고, 케이크 진열장에서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간신히 사진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오죽하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진열장 앞에서 사람들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자 뒤에 있던 어느 할머니께서 먼저 사진을 찍으라고 양보해주셨을 정도였다. 역시나 카페는 모두 만석이었고 나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하릴없이 쇼핑몰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이틀간의 투어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멜버른에 있던 일분일초가 아쉬웠던 나는 직장인들처럼 이른 시간에 호스텔을 나와 몇 시간을 서서 앉아있지도 못하고 돌아다녀야만 했다. 시드니와는 다르게 다소 습한 날씨와 무더운 온도에 진이란 진은 다 빠져 더 이상은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고, 간신히 찾은 스타벅스에서 아이스라떼 한 잔을 들이켜자 정신이 간신히 돌아온 듯하였다. 그렇게 잠시나마 꿀같은 휴식을 취한 뒤 서둘러 다음 관광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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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19-47.jpg 왕립 전시관 (Royal Exhibition Building)

후회 없는 여행이다 자부하던 멜버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45불짜리 맥그로우 인형과 왕립 전시관이었다. 유럽에서도 그림에 대한 조예가 없고 무교인지라 종교 지식이 없으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미술관에서 '이 나라에만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림을 하나라도 더 보게 되었고, 그중 오스트리아 왕조에 대해 일절 알지 못했더라도 오스트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전시관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런 연유로 왕립 전시관에 꽤나 기대를 품었던 나는 땡볕에 애써 찾아갔음에도 문이 닫혀있어 별 수없이 내부만 둘러보고 돌아와야만 했다. 사실 폐관 시간이 임박하였던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개관시간에 찾아갔어도 내부 사정상 개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전시관에 자태에 반해 어떻게 해서든 사진에 모두 담아보고자 애를 써댔다. 마치 영국 왕족이 상주해있을 것만 같은 이 왕립 전시관은 1880년과 1888년 열린 국제전시를 위해 건축되었는데, 건물이 하나의 궁전과도 같았던 이유는 당시 국제박람회에서 전시관을 하나의 궁전으로 짓고자 하는 사회현상과도 맞물려 있었다. 현재까지도 멜버른이 '호주의 유럽'이라 불리며 호주 내 문화도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왕립 전시관이 이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멜버른이 문화 예술 중심지로서 더욱더 성장하길 바라는 그 당시 바람이 녹아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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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22-37.jpg 칼턴 정원 (Carlton Gar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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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전시관까지 둘러본 나는 이대로 숙소로 돌아갈지 고민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것 다닐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세인트 킬다행 버스에 올랐다. 한국에서 자금난에 시달린 덕에 그다지 좋은 핸드폰을 구비하지 못했던 나는 남들과 같은 요금을 내로 3g를 사용하는가 하면 GPS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시드니에 살며 종종 곤혹을 치렀다. 아니나 다를까 세인트 킬다 비치를 갈 당시엔 하마터면 멜버른 한복판에서 미아가 될 뻔하였다. 지도 상으로는 이제 겨우 반 정도 온 것으로 보여 조금 더 마음을 놓고 음악을 듣는 여유를 부렸던 나는 일제히 사람들이 버스를 빠져나가자 무슨 일인가 싶어 직감적으로 부리나케 지도를 확인하였다. 그제서야 지도에 표시된 내 위치는 2배가 넘는 거리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세인트 킬다에 지금 도착하였노라고 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버스에서 부리나케 내려 세인트 킬다까지 가는 도중 길을 잃은 탓에 그리피티를 구경하다 이내 길을 찾고는 다시 비치로 향하였다. 야자수 나무와 함께 누가 보아도 이곳이 관광지임을 알 수 있듯이 즐비한 상점거리를 지나자 이윽고 세인트 킬다 비치가 눈에 들어왔고, 어느덧 해가 저무는 탓에 바다 뒤로 노을이 지는 장관도 감상할 수 있었다. 항구 쪽으로 다다르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제 내가 보았던 조그만 펭귄 무리들을 보고자 구경하였고, 이번에도 펭귄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잠시 앉았다 기다렸지만 점점 해가 더 저물어가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발길을 옮겨 조금 더 비치를 둘러보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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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29-36.jpg 세인트 킬다 (Saint Kilda)

나는 개인적으로 시드니에서 바다는 원 없이 보았다는 생각에 세인트 킬다 비치에는 큰 감흥은 못 느낄 것이라 자부하였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곳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꽤 운치 있는 곳이었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본다이 비치는 청춘영화에 어울릴법한 곳이라면 세인트 킬다 비치는 잔잔한 로맨스 영화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같은 항구임에도 서큘러퀘이가 워낙에 넓고 큰 데다가 즐비하게 늘어선 레스토랑과 조명 덕에 고급진 느낌마저 든다면 이곳은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산책하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때 보았던 노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세인트 킬다 비치는 내게 꽤나 낭만적인 곳으로 기억되었고, 특히나 영화 라라랜드에서 극 중 세바스찬이 'City of Stars'를 부르며 거닐던 부두와 꼭 닮아서 초저녁에 이곳을 방문한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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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01-30-58.jpg 루나 파크 멜버른 (Luna Park Mel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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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드니에서 반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못 가본 루나파크에 미련이 남았던지라, 멜버른 루나파크에서 입장은 못하더라도 입구 앞에서 사진은 찍어보자며 세인트 킬다 비치에서 2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갔다.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정문을 사진에 담은 후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인트 킬다 맛 집을 찾아가기로 한 나는 호기롭게 홀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외국에서 반년 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왁자지껄한 특유의 힙하고 들뜬 분위기에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조용한 햄버거집으로 들어와 홀로 자축하며 맥주를 즐겼다.


당시의 나는 그런 왁자지껄한 곳을 홀로 들어갈 용기도 부족했던 데다가 시드니도 아닌 낯선 도시에선 더더욱이 용기가 솟지 않았다. 애써 혼자라도 행복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에 햄버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는 맥주 한 병을 모두 비운 후 씨끌벅적한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진 8시간 가까운 거리를 걸었던 나는 숙소로 돌어갈 법도 했지만 오늘이 멜버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홀로 멜버른 스타 관람차(Melbourne Star Observation Wheel)를 타보고자 서둘러 우버를 불렀다. 폐장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몇십 불에 이르는 거금을 내고 헐레벌떡 도착했던 관람차는 아니나 다를까 이미 폐장하여 불이 꺼져있는 상태였고, 택시 안에서 빛났던 스타 관람차는 막상 그 안에 들어오자 불 꺼진 놀이동산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홀로 관람차를 타고 야경을 즐길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보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마저도 사소한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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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10시간에 가까운 도보여행을 마친 후 야라강 야경을 보기 위해 시티로 돌아온 나는 도저히 당이 떨어져서는 견딜 수 없어 맥도날드에 들려 좋아하는 초코 셰이크를 손에 든 채 야라강 야경 구경에 나섰다. 그 와중에 가이드북에 소개된 '퀸즈 브리지'를 찾아 헤매느라 다리 위에서 또 한참이나 걸었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노후했던 다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 야경은 퍽 아름다웠다. 퀸즈 브리지를 찾다가 건너게 된 에반 워커 브리지(Evan Walker Bridge)는 다리에 설치된 조형물 탓에 그 주변이 모두 반짝이고 있었고, 야라강 야경을 홀로 바라보자 어느덧 멜버른 여행이 끝나고 다시금 시드니로 돌아가 구직활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짐짓 우울해지기도 하였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다리를 건너기 전, 무슨 용기에서인지 크라운카지노를 지나쳐 그 앞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난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낯선 도시를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온종일 밖에서 걸어야만 했던지라 자기 전 돌돌 만 이불 위에 퉁퉁 부은 다리를 올려놓자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하였다.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을 거쳐 acmi부터 시작하여 세인트 킬다 비치를 지나쳐 야경까지 보고 온 강행군이라니.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은 몸은 고될 수로 내심 뿌듯했던지라 아직 채 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내일 비행 전에 다 둘러볼 수 있을지 고민하며 그간 찍은 수십 장의 사진 중에 몇 개를 건져 보정까지 마친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이 날의 강행군 이후로 반년 후에 나는 한국에 DDP에서 동일한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전시 소개에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호주 멜버른을 거쳐 대한민국 서울에 오게 되었다는 문구를 보자, 전시회가 나를 따라온듯한 기분에 반가우면서도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전시회가 열리던 그 기간에 내가 멜버른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시기에 맞추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하나의 전시회를 각기 다른 나라와 아트디렉터로 인하여 새롭게 보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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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80704_190526620.jpg 한국의 전시회 및 굿즈

동일한 전시회를 각기 다른 나라에서 본 이후로 느낀 점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구상하는 아트디렉터에 따라 같은 전시작도 확연히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점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시회를 대하는 방법이 꽤나 개방적이라는 것이었다. 멜버른에서 본 아드만사 전시회는 어두운 조명 속에서 제작사의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세트들을 하나의 미술작품을 대했다면, 한국에서는 시종 밝은 조명으로 하나의 작은 테마파크에 들어온 기분을 들게 했다. 단적이 예로 허당 해적단의 세트 중 하나인 거대한 해적선을 멜버른 전시회에서는 유리관에 전시한 것이 전부였다면 한국에서는 그 주변에 바다를 연상케 하는 그럴듯한 배경을 설치하여 연출했다는 것이다.


또한 촬영에 대하여 별다른 제제가 없었던 멜버른 전시회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사진이 허락되는 곳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는데, 관람객들이 SNS으로 후기를 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한 것이 그 이유다. 멜버른에서는 전시회에 전시된 세트들을 그림처럼 관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전시회를 대하는 관람객들의 태도가 꽤나 역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전시회를 관람한다기보다는 '전시회에서 논다'라는 말이 더욱 어울렸던 데다가 전시회 측의 홍보도 어른보다는 아동들에게 맞춰진 듯 보였다. 전시회의 모든 세트들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다면, 몰려드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작품을 감상하기란 불가능했을 터였다.


멜버른에서 전시회를 다녀온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케언즈와 브리즈번에서도 각각 유명한 전시회를 관람하였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하여 모든 해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행지에서 전시회를 가는 것이 내게 있어 여행을 즐기는 방법 중 새로운 한 가지로 남게 되었다. 3개국 이상을 순회하는 월레스와 그로밋 전시회와는 달리 케언즈에서는 호주의 떠오르는 신예 예술가에 대한 작품들을 보았고, 브리즈번에서는 태생은 중국인이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안 발레단원으로서 성공한 발레리노를 다룬 전시를 보았다. 어쩌면 미술에 대하여 잘 모르고 종교적으로도 문외한인 내가 굳이 여행 중에 전시회를 찾았던 이유는 전시가 열리는 기간과 내가 여행하는 기간이 맞아떨어져야만 볼 수 있는 낭만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운명적인 순간은 그렇게 여행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둘러싸인 다양한 경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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