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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02. 2019

[D+111] 서점이 주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

Town Hall Square에서 마음에 드는 서점을 발견하다

몇 주전, 시에나언니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 언니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그리운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한글로 가득한 서점에 몇 시간이고 서성이며 책들을 구경하는 것이라고. 종로문화재단에 근무하던 시절, 약 2시간 가까이 되는 무자비한 통근시간에도 불구하고 종로를 좋아했던 이유는 퇴근 후 대형서점에 들어가 마음껏 책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굳이 날을 잡고 오지 않더라도 틈틈이 신간을 구경할 수 있었고 또 굳이 몇 권씩 모아 사지 않아도 책이 고플 때 한두 권씩 사서 보는 묘미가 있던 그 시절. 나는 처음으로 근교에 사는 것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런 나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듣던 언니는 나에게 굳이 원서를 다 읽지 못하더라도 한국에서처럼 서점을 가보라고 말했다. 사실 시드니에서의 서점은 뭐랄까. 들어가 봤자 별 소득 없는 구멍가게와도 같은 기분이었달까. 서점을 가는 이유는 곧 책을 구경하기 위함이고 책을 본다는 것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인데. 여전히 초등학생(어쩌면 유치원생) 실력의 영어실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원서 한 권을 해석하는 것에도 힘이 부쳤다. 그런 연유로, 나는 시드니에서 서점이란 선택지를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Town Hall Square 내 The Book Grocer 서점

퇴근 후 도무지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은 어느 날, 나는 오후까지 운영하는 서점을 찾아 타운홀로 향했다. 복잡한 쇼핑센터 내에서 책들이 잔뜩 진열돼있는 이질적인 느낌의 서점이 눈에 띄었고, 이윽고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활자들 사이에서 익숙한 책 냄새가 풍겨졌다. 제본된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서점만이 갖고 있는 고요하고도 정숙한 분위기. 도서관보다는 다소 혼잡스럽고 상점보다는 고요한 서점만의 차분한 그 분위기. 비록 한국에서처럼 책의 서문을 읽고 목차를 뒤진 뒤, 한쪽 페이지를 읽어보며 작가의 문체를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그 분위기에 취해 서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언니의 말처럼 여기 있는 책들을 몽땅 읽고 싶어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욕구마저 샘솟았다. 영어가 회화를 뛰어넘어, 언어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책의 표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독서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서점을 조금 더 둘러보다 이윽고 나의 현실을 파악 후 어린이 코너로 다가가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얇은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렇게 타운홀 스퀘어에서 한 손에는 책을, 한 손에는 한국에서 즐겨 쓰던 모자와 비슷한 모양의 털모자를 손에 든 채 밖으로 나와 어느덧 익숙해진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날따라 유난히 듣기 좋은 버스킹 공연에 잠시 길을 멈추어 감상하다 기타리스트 가방에 동전 몇 달러를 넣은 후 집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도무지 돈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는 음악이었다.


매일을 여행처럼 살리라 다짐하지만, 일이 개입되는 순간 그 다짐은 좀처럼 실행하기 어렵다. 워킹홀리데이라는 단어 자체에 상당한 어패가 숨겨져 있는 기분일 정도랄까. 그럴수록 가장 최선의 방법은 여행자와 노동자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매일 똑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엔 과감히 여행자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일꾼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오후에는 번거롭더라도 평소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퇴근 후 못다 한 구경을 마저 하는 것. 어쩌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시티에 살지 않는 것 또한 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관광지에서 벗어나 조용한 우리 동네로 돌아와서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그 기분을, 좀처럼 놓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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