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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07. 2019

[D+123] 시드니 천문대 & 맨리 비치 / 연애시대

낯선 시드니에서의 연애란

처음 가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풍경에 익숙함마저 드는 공간이 있다. 나에게 있어 그러한 장소들은 주로 해수욕장이었는데 최근 몇 년간 동해를 1년에 두어 번은 넘게 다녀온 나로서는 사실 바다만 보아도 동해가 떠올랐다. 까슬까슬한 모래자갈 앞에 펼쳐진 넓은 바다, 그리고 특유의 비린 냄새까지. 호주에 도착하여 처음 바다를 본 그 순간에도 나는 동해가 떠올랐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소중했던 사람들과 자주 찾곤 했던 한국의 바다 냄새를 이번에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맡았다는 정도.


며칠 전,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묻는 K의 말에 나는 곧장 '시드니 천문대'를 외쳤다. 사실 라라 랜드를 족히 4번 이상을 본 나로서는 천문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로맨틱함이 꽤 매력 있게 다가왔고, 다소 혼자 가기에 쓸쓸하다는 의견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냉큼 그곳을 말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서큘러 퀘이에서 만나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볕이 잘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았고, 점심을 다 먹은 후에도 우리는 양옆에 앉은 아기들에게 곧장 시선을 뺏겨 자리를 떠나지 못하다 해가 지기 전에 시드니 천문대로 향했다.

시드니 천문대 (Sydney Observatory)

천문대로 향하는 언덕은 그다지 높진 않았는데, 햇살이 좋아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싱그러웠다. 누군가 시드니 천문대는 밤보다도 낮이 더 이쁘다는 말에 꽤 의아했는데, 막상 언덕 위로 올라가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문대 앞에서 내려다보는 서큘러 퀘이의 전경은 보는 순간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었고 그 풍경을 죄다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천문대 내부는 마치 오래된 외국 저택을 보는 것 같았는데 시드니 천문대의 역사와 관련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어 작은 박물관처럼 느껴지게 했다.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자 언덕 바로 위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한층 더 높은 시야에서 더 락스와 서큘러 퀘이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시드니 천문대 특유의 이국적인 생김새에 마치 그 순간 시드니가 현대적인 도시가 아닌, 조금 더 고즈넉한 멋을 지닌 곳처럼 느껴졌다.


천문대를 모두 구경하고 잠시 바람을 쐴 겸 벤치에 앉았는데, 바로 옆에서 웨딩촬영에 한창인 커플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소 세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신랑 신부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몰아치는 바람에 굴하지 않고 촬영에 임하는 그 들을 보자 그 모습을 찍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이 넓고 싱그러운 언덕이 그 들 만을 위한 자리처럼 보였달까. 이상하게도 나는 결혼에 관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접하게 되면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그렇게 천문대를 빠져나와 현대미술관 맨 위층에서 커피를 마신 우리는, 내려오면서 그림들을 간단히 둘러본 후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 이내 맨리 비치로 향했다. 사실 나에게 있어 시드니 시티는 더는 특별한 곳은 아니었던지라, 다소 이른 시간에 그대로 시티에 돌아가기는 아쉽기도 했고 때마침 K가 두 가지 보기를 준 덕에 페리를 타고 바다로 넘어간 것이다. 맨리 비치에 도착해있을 즈음엔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거리는 마치 실외 테마파크와도 같았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지나 탁 트인 바다를 보자 그제야 내가 배를 타고 바다로 왔음을 실감하였다.

맨리 비치 (Manly Beach)

낯선 바다에서 익숙한 바다 내음이 났고 한국에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찾았던 그 바다를, 이곳에서 다시 보았다는 생각에 괜스레 반갑고 그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생각해보면 바다는 언제나 내게 누군가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휴식이었는데, 그런 휴식을 처음으로 낯선 곳에서 이제 막 친해진 누군가와 함께 찾은 것이다. 다소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 더 그곳에 머물렀고 다소 옷이 얇았던 나는 도무지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산책을 포기한 채 다시 그 아기자기한 거리로 돌아왔다.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다시 이 곳을 찾아, 모래 위에 널브러진 채 눈부시게 반짝일 바다를 감상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누군가를 만나 친해지고 종국에는 연애로까지 발전하는 그 일말의 과정을, 나는 이곳에 와서 어려운 일임을 깨닫고 포기해버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 딴에는 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이 상대방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 그리고 그런 마음이 지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보고 이제는 정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를 잠시 품었다가 이내 무너지는 것 등. 대개 비자가 있고 언제 떠날지 모르며, 혹은 언제까지 머물지 모르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진득하게 만나 서서히 감정과 시간 등을 공유하는 일이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몇 달이 되어서야 비로소 체감한 것이다. 그것이 짝사랑이던, 아니든 간에.


몇 년 전 쓴 글들을 최근에 다시 읽다가, 나는 고등학교 때 적은 유치 찬란한 메모를 발견하였다. 당시 나이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서른 살 삼순이의 마음이 유독 와 닿았던, 마음이 딱딱해지길 바란다는 그 대사. 그 대사 한마디에 크게 절감하고 만다는 그 시절 나의 글에 도무지 유치해 못 견디겠다가도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섣불리 좋아하고 홀로 고민하다 상처 받는 그런 칠푼이류. 어쩌면, 의지할 누구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그 말도 죄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이토록 눈부시고 때로는 낯선 이곳에서 사랑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사랑이 쉽게 휘발될 수 있는 유희적 연애가 아님에 그저 상처라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음을 닫으려 노력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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