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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Oct 20. 2019

[D+165] 뉴타운 & 맨리 비치 / 워홀 권태기

호주 생활의 권태를 느끼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3,6,9를 조심하라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일상에 이 곳이 외국인지 한국인지 더욱 모호해졌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고민할수록 답을 내리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시드니에 온 지 반년이 되어가는 지금 워킹홀리데이 권태기에 진입한 것다.


개인적으로 감정 소모가 심했던 날들, 힘에 부치는 주방일에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기분까지. 어린 시절 자기소개서에 장래희망을 놓고 고민하던 때처럼 지금 어디 즈음에 와 있는지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니, 사실 고하자면 고민하다기보단 회피에 가까웠달까. 그럴수록 주말을 집에서 보내기가 영 꺼려졌고 같은 맥락으로 당장 일자리를 그만두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날에 입국한 지안이와 틈만 나면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나는 지안이와 서로의 사적이고도 공통된 고민들을 나누며 잠시나마 권태에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뉴타운 (New Town)

그 첫 번째 노력은 바로 뉴타운이었다. 전통적인 유럽풍의 도시와는 다르게 시드니는 현대적인 건축물로 메워진 도시였고, 그 덕에 나는 종종 이 곳이 외국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했다. 유럽 하면 떠오르는 이국적인 풍경과는 다르게 시드니는 도처에 쇼핑센터가 널린지라 맨몸으로 한국에서 날아온다 할지라도 어렵지 않을 정도랄까. 강남 한복판 같은 거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뉴타운은 여행 온 기분을 느껴주기에 충분하였고, 마치 시드니 안에서 작은 유럽 마을을 본 기분이었다. 지나가며 예쁜 옷들이 시선을 잡았지만 가격은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 사악하였기에 아이쇼핑으로만 만족해야 했고, 유명한 카페를 찾았지만 앞선 아이쇼핑 삼매경으로 인해 영업시간을 놓쳐야만 했다. 결국 흔하디 흔한 카페 체인점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우리는 마치 대화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뉴타운을 돌다 보면 예쁜 서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곳들은 마치 영화 노팅힐에 등장할법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심하게 놓인 사다리와 낡은 타자기 그리고 서점 내에 가득한 책 냄새까지. 나는 원서를 본다 한들 한 페이지 겨우 읽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에만 들어가면 이해하지도 못할 책들을 펼쳐보게 된다. 수익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의 재력이 되었다면 이런 이국적인 분위기의 서점에 원서와 한국 책들을 온통 진열해놓고, 책날개에는 주인장의 추천사를 붙여놓았을 것이다. 그러한 상상에 미치자, 나는 서점에서 선뜻 발길을 뗄 수 없었다.


뉴타운 투어를 끝으로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또다시 시티를 벗어났다. 우리는 맨리까지 저속 페리를 타고 갔는데, 바다를 볼 수 있는 바깥 좌석에 앉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주는 호사를 만끽하였다. 배 위로는 여전히 햇살이 눈부셨고, 선선한 바람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마치, 더운 여름날 시원한 선풍기 바람에 잠이 솔솔 오는 것처럼. 내리기 싫을 정도로 바닷바람을 쐬는 호사를 부리다, 우리는 이내 맨리에 도착하였고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자 드디어 해변가에 도착했음이 실감 났다.

맨리 해변 (Manly Beach)

해변가에 위치한 카페에 각자 음료를 시킨 후 우리는 해가 점점 저물어가는 것을 보며 그곳의 평안한 분위기에 차마 자리에 떠날 수 없었다. 카페에 앉아있는 것이 잠시 지겨워진 우리는 모래 위로 자리를 옮겼고 그렇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로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다음에는 꼭 샌들을 신고와 발이라도 담가보자며 약속하였다. 사실 그날 우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수영복 차림이거나, 당장 바다에 다리 정도는 담가도 될 정도의 차림이었는데, 위아래로 껴입고 온 우리는 그 사실이 못내 속상했던 것이다. 다시 시티로 향하는 페리에 타서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갔고, 비키니를 입기 전에 반드시 운동을 하겠다며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다짐은 불과 이틀 만에 철저히 무너졌지만.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적어도 그 나라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했음을 깨달았다.)


지안이와 함께 주말에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워홀 권태기는 잠시 도망간 듯싶었지만 이내 다시 찾아온 우울한 일들이 내 앞에 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동과 여가라는 도무지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그 두 단어를 하나로 묶어놓은 제도 아래, 어느 날은 노동자의 삶에 지치다가도 어느 날엔 여행자인 것을 몸소 실감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레주메를 수정하려 노트북을 살피다 호주를 오기 전 생각했던 당찬 포부들과 준비해둔 많은 것들에 잠시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이곳에 무엇을 하려 왔을까. 어쩌면, 단순히 '영주권을 따려고 시도해보기 전에 먼저 살아보는 것'이라는 목표 자체가 워낙 추상적인 목표는 아니었을까.


외국에서 혈혈단신 살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하다고 칭찬을 하여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독하게 살지 못하겠냐고 채근해야 할까. 조금 위로되는 것은 이곳에 와 있는 수많은 워홀러들 중에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이며 그것만으로 '워홀 실패자'라는 도장을 스스로에게 새기고 싶지는 않단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워홀러들의 실패 사례'에 도무지 내가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다가도, '그게 왜?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잖아'라며 스스로를 위해 항변하고 만다. 사실 결과가 눈앞에 떡하니 보여야만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고방식에 지쳐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저 한국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살던 그때에 비해 마음 어딘가 속 편하고 후련한 구석이 있다면 된 것 아닐까. 어쩌면,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 아래에 나는 외국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고, 먹고사는 생활 자체에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됐다고. 행복에 반드시 결과가 따라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어느덧 반년밖에 남지 않은 호주 살이가 내심 아쉬워졌다. 여전히, 나는 지루함과 아쉬움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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