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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라비다바다 Jun 08. 2024

퇴근 후 무기력하게 유튜브만 본다면

시원한 밤바람 따라 자전거 야행

퇴근 후 나만의 저녁시간을 잘 보내보겠다고 루틴 형성에 오랫동안 힘을 들였는데, 일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오면 루틴이고 뭐고 다 휩쓸려 간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해지고, 나만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에서 무기력함이 온다. 그래서 집에 오면 당장의 이 힘든 기분을 잊고 싶어 짧은 시간에 강한 자극을 주는 유튜브 쇼츠를 연다. 아무 영상이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마구 아래로 내리고 내린다. 몇 초는 감동적인 영상에 눈물 쏙 뺐다가, 다음 쇼츠를 보면서는 깔깔 웃었다가. 표정 변화는 이리도 다이나믹하게 일어나는데, 돌아보면 내가 무얼 봤는지 기억이 안난다. 시간만 통째로 삭제돼있고 얼른 자야 할 시간이다. 일어나면 또 출근해야된다니, 퇴근과 출근 사이에 시간의 공백이 없이 바로 이어지는 듯 하다. 유튜브만 보면 꼭 이런다. 




더이상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어제는 퇴근 후 무작정 옷을 갈아입고 뛰쳐 나왔다. 내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한강으로 가자는 마음만 있었을 뿐. 따릉이(서울 공공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한강을 향해 바퀴를 빠르게 굴려 보았다. 하루종일 앉아있는 정적인 일상에 이런 동적인 움직임이 얼마만인지. 오르막길이 나와도 오랜만에 다리 힘을 쓴다는 생각에 반갑기까지 했다. 요즘 바람은 이렇게 시원했나볼과 머리칼 사이로 시원하게 지나가는 바람 덕에 기분이 산뜻해졌다. 휴대폰도 분위기 파악을 좀 하는지, 이어폰에서는 이 살랑이는 밤바람에 어울리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무기력하던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입가에 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밤의 한강을 돌며 마주하는 장면들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어둠이 내려앉은 강물을 찬란하게 비추는 조명들. 그 빛을 받아 훤히 보이는 물결의 색과 모양. 그리고 그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을 멀리서 보고 있으니 바쁜 현대사회와 잠시 거리를 둔 것만 같았다. 서울에 있는데 서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또 길 한쪽에 만개해있는 꽃들을 보니, 이곳이 바로 나만을 위한 정원 같았고. 갑자기 길고양이가 튀어나와 내 옆에서 같이 달릴 땐, 순간 내가 스즈메(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고양이와 함께 달리는 주인공)가 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올려들어 밤하늘도 보았다. 늘 내 위에 있었을 텐데 낯선 장면이었다. 요즘의 달은 저런 모양이었구나, 아직도 서울에 별이 있긴 하구나. 새삼 그동안 눈 앞의 것에만 집중하느라 하늘을 올려다본지 오래 됐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윗풍경을 감상하며 가는데 길 양쪽에 큰 나무들이 자라 나뭇잎들이 맛닿아 있는 길이 이어졌다. 방천장, 사무실 천장이 아닌 하늘천장, 나뭇잎 천장 아래 있다는 것에 온 몸에 해방감이 돌았다.


또 이 어둑한 평일 밤, 한강을 찾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제각각 바쁜 낮을 보낸 후 이곳으로 부지런히 모여든 모습들이 좋아보였다. 헉헉대며  열심히 달리는 또래들, 그리고 영 뛰는 자세가 어색하지만 달리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멋있어 보이는 어르신들. 발맞춰 걸으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 헬멧 쓴 꼬마아이를 뒤에 태우고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아주머니. 하루의 마무리를 이리도 활기차게, 또 낭만적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단 걸 실감했다. 그 평화롭고 열정 넘치는 분위기에 나도 빠져들어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방에 박힌 채 유튜브만 볼 땐 몰랐던 훈훈한 밤풍경이었다.


나는 이런 밤풍경이 계속 보고싶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장면들. 그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도 무탈히 지나갔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고, 시원한 밤바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속마음의 외침이 입밖으로 절로 나왔다. 


여전히 나는 퇴근 후 저녁을 어떤 루틴으로 다시 꼼꼼히 채워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얼 해야할지 모를 때 방바닥에 눌러 붙어있지말고 일단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건 명백히 알겠다. 


무기력해질 땐 따릉이에 몸을 싣고 한강이든 중랑천이든 서울의 밤공기 따라 어디든 달려야지. 낮에 뜨겁게 쌓인 피로들을 밤바람에 다 날려 보내야지.  






내가 좋아하는 한강 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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