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밤바람 따라 자전거 야행
퇴근 후 나만의 저녁시간을 잘 보내보겠다고 루틴 형성에 오랫동안 힘을 들였는데, 일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오면 모든 다짐이 통째로 휩쓸려 간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해지고, 나만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에서 무기력함이 온다. 그래서 집에 오면 당장의 이 힘듦을 잊고 싶어 짧은 시간에 강렬한 자극을 주는 유튜브를 연다. 아무 영상이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마구 위아래로 움직인다. 몇 초는 감동적인 영상에 눈물콧물 쏙 뺐다가 이내 깔깔 웃었다가 표정은 변화무쌍한데 돌아보면 내가 무얼 본건지 기억이 안난다. 시간을 통째로 도둑맞아, 얼른 자야 할 시간이다. 일어나면 또 출근이라니, 퇴근과 출근 사이에 시간의 공백이 없이 바로 이어지는 듯 하다. 유튜브만 보면 꼭 이런다.
더이상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어제는 퇴근 후 무작정 옷을 갈아입고 뛰쳐 나왔다. 내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강가로 가자는 마음만 있었을 뿐. 따릉이(서울 공공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중랑천을 향해 바퀴를 빠르게 굴려 보았다. 하루종일 앉아있는 정적인 일상에 이런 동적인 움직임이 얼마만인지. 오르막길이 나와도 오랜만에 허벅지 근육을 써본다는 생각에 반갑기까지 했다. 요즘 바람은 이렇게 시원했나. 볼과 머리칼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덕에 기분이 산뜻해졌다. 휴대폰도 분위기 파악을 하는지, 이어폰에서는 이 살랑이는 밤바람에 어울리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무기력하던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입가에 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밤의 강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어둠이 내려앉은 강물을 찬란하게 비추는 조명들. 그 빛을 받아 훤히 보이는 물결의 색과 모양. 그리고 그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을 멀리서 보고 있으니 바쁜 현대사회와 잠시 거리를 둔 것만 같았다. 서울에 있는데 서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또 길 한쪽에 만개해있는 꽃들을 보니, 이곳이 나만을 위한 비밀정원 같았고. 갑자기 길고양이가 튀어나와 내 옆에서 같이 달릴 땐, 순간 내가 스즈메(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늘 고양이와 함께 달리는 주인공)가 된 것만 같았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고개를 들어올리니 낯선 밤하늘이 보였다. 요즘의 달은 저런 모양이었구나, 아직도 서울에 별이 있긴 하구나. 늘 내 위에 존재하는 하늘인데도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고개를 올려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윗풍경을 감상하며 가는데 길 양쪽에 있는 큼직한 나무들의 나뭇잎이 맛닿아 있는 길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방천장, 사무실 천장이 아닌 푸릇푸릇한 나뭇잎 천장 아래 있다는 것에 온 몸에 해방감이 돌았다.
또 이 어둑한 평일 밤에도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제각각의 바쁜 낮을 보낸 후 이곳으로 부지런히 모여든 모습들이 좋아보였다. 흘러 넘치는 에너지를 농구공 하나에 들이붓는 남학생들, 땀을 닦으면서도 끝없이 달리는 젊은 청춘들, 반려견 놀이터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강아지들과 그 주인들, 텃밭에 식물 무럭무럭 자라라고 차르륵 물 뿌리는 아저씨, 그 텃밭 구석에 개인 테이블과 전구를 설치해두고 집에서 싸온 음식을 나눠 먹는 어르신들. 하루의 마무리를 이리도 활기차게, 또 낭만적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단 걸 실감했다. 그 평화롭고 열정적인 분위기에 나도 절로 빠져들었다. 방에 박힌 채 유튜브만 볼 땐 몰랐던 훈훈한 밤풍경이었다.
나는 이런 밤풍경이 계속 보고싶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장면들. 그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도 무탈히 지나갔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고, 시원한 밤바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속마음의 외침이 입밖으로 절로 나왔다.
마음에 환기가 일고 있었다. 한낮에 뜨겁게 쌓인 잡다한 생각과 불쾌한 기억들이 밤바람 따라 날라가고, 하얗고 안온한 마음이 되었다. 환기가 필요한 건 나의 조그만한 원룸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새 바람이 필요한 것을, 그동안 왜 그걸 모르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마음에 잡다한 찌꺼기들을 더 쌓았던건지.
매일 밤 이렇게 마음의 창을 자주 열어주어야겠다. 참 시원한 밤이다. 개운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