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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Dec 24. 2020

남쪽나라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2020년 12월 24일, 새벽 6시 30분. 크리스마스 이브인 오늘은 날이 꽤 더울 것 같아서 아침 일찍 오븐을 예열해두고, 피칸 파이를 만들 준비를 해봅니다. 어젯밤에 미리 구워둔 피칸을 미리 꺼내두고, 파이 속을 채울 계란 물을 살짝 녹여서 포크로 휘휘 저어둔 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아직 덜 깬 잠을 깨어 봅니다. 


오븐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피칸 파이의 냄새가 집에서 진동하는 동안, 옆집 할머니와 앞집 아저씨에게 피칸 파이와 함께 건넬 작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적어봅니다. 반팔을 입은 산타가 그려진 카드가 좋을지, 아니면 서핑을 하거나 맥주 한잔을 건네는 산타가 좋을지 고민을 하다가 펜을 들어 한 글자씩 적어봅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올해도 남쪽 나라에서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이곳에서는 보통 크리스마스 때, 커다란 햄이나 칠면조를 노릇노릇 오븐에 오랫동안 구워서 나누어 먹으며 가족끼리 모여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터라, 저도 몇 주 전부터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어요.


냉장고에는 커다란 햄과 메이플시럽, 머스타드 소스를 미리 채워두고, 꼬마 손님들을 위한 초콜릿 퐁당과 어른들을 위한 피칸 파이를 만들 재료를 준비해놓고, 알록달록 예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그려진 틴에 들어 있는 파네토네( 이탈리아에서 크리스마스 때 먹는 당절임 레몬과 과일이 들어간 폭신한 빵)와 새콤달콤한 와사비 소스와 곁들여 먹을 커다란 훈제 연어도 주문했거든요. 


아, 물론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로 보낼 와인과 작은 선물들을 포장하고, 크리스마스 크래커 (Christmas Cracker; 사탕 모양으로 된 종이 꾸러미. 속에는 종이 왕관과 수수께끼나 작은 유머 등이 들어 있어요) 등 크리스마스 저녁 식탁을 꾸밀 손님맞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장식도 샀더라고요.


친구의 남편이 호주의 크리스마스를 보여주고 싶다며 정성들여서 구웠던 칠면조.


그런데 며칠 전, 저희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집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연말 일정이 다 취소되었지만, 잘 식힌 피칸 파이와 카드를 이웃들에게 전해주며 잠깐 수다를 떨고 돌아와 캐럴을 틀어 볼륨을 높여봅니다. 


캐럴은 눈 오는 추운 겨울 따뜻해지는 느낌으로 듣는 게 행복했는데, 시원한 수박 생각이 간절해지는 매미 소리가 어우러지는 이곳 남쪽 나라에서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참 적응이 안 되기도, 여전히 신기하기도 해요.


뒷뜰에서 따온 고추와 샐러리 여린 잎, 그리고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위해, 너무 더워지기 전에 심어놓은 오이와 고추, 토마토 몇 알과 민트와 샐러리 새싹을 뚝뚝 따서 얼음물에 담가둡니다. 고랑이는 맥주와 소주(고양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간식도 사 오고, 저는 집에 종종 날아드는 새들을 위해서 물도 갈아주고 새 모이도 조금 더 넉넉히 채워 본 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제는 제법 거리가 떨어진 도시에서 사는 언니들, 동생들에게 연락해봅니다. 직접 전하고 싶었던 카드는 우편으로 보내기로 하고, 온라인으로 만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영화를 함께 보기로 약속을 정해봅니다.






뒷집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함께, 담장 너머로는 부지런히 잔디를 깎는 소리가 곳곳에서 퍼집니다. 고랑이는 그동안 바빠서 돌보지 못한 창고에 들어가 몇 시간 씨름을 하며 녹슨 것을 부지런히 닦아내고 청소를 하더니, 친구들에게 보낼 카드 몇 장을 쓰다가 식탁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낮잠을 청하네요. 


저는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요즘 제철인 노오란 망고 하나를 크게 썰어 놓고 먹으며 크리스마스 카드를 마저 써봅니다. 냉장고에 제법 시원하게 넣어놓았던 망고였는데, 더운 날씨 덕인지 벌써 망고 속살이 평소보다 더 시원하게 입안에서 퍼집니다.


크리스마스 크래커(Christmas Cracker). 안에는 종이왕관과 퀴즈, 작은 유머가 든 쪽지등이 들어있어요.



오늘 점심때,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던 언니와는 크리스마스 맞이 점심약속은 코로나로 취소 되었지만, 더 반가운 내년을 기약하며 평소보다 조금 길게 전화 통화를 해봅니다.


언니: 세상에~ 이거 개구리 소리야? 개구리 소리가 들려.

유자마카롱: 응응 언냐, 여기 밤에 개구리도 귀뚜라미도 울어요. 한여름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어째 몇 년이 지나도 낯설어...


언니를 통화하다가 한겨울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봅니다. 쌀 포대 하나로 신나게 몇 시간을 타던 썰매, 매일 끌려가듯이 한 달 내내 엄마 손 붙잡고 가던 새벽 미사, 일 끝나고 막차를 타고 오는 길에 맞이했던 쓸쓸했던 크리스마스, 성탄전야가 끝나고 만나는 산타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아이들,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며 남동생과 입가 가득 기름 묻히며 먹던 치킨과 피자, 함박눈을 맞으며 좋아했던 남자아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카드를 들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이브 밤, 반짝반짝한 불빛보다 더 따뜻하게 손잡고 다니는 가족들과 연인들, 출근길에 피식 웃음이 났던 크리스마스 버스, 냉장고에 남아있던 동지팥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동치미 국물과 고들빼기, 김치와 함께 먹던 크리스마스 밤…. 



이젠 남쪽 나라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기억을 하나씩 덧붙여 봅니다.

망고 철인 크리스마스에 망고 냄새로 맞이하는 마트 입구, 집마다 현관에 다채롭게 꾸며놓은 서핑하는 산타와 선글라스 낀 루돌프, 오븐에 간신히 들어갈 듯 비현실적인 크기의 칠면조, 늘 주방에 가득 채워진 사탕 바구니, 욕조에 가득 얼음과 함께 채워진 시원한 맥주들, 줄다리기하듯 두 사람이 잡고 '따닥' 소리를 내며 열어보는 크리스마스 크래커, 한입을 먹으면 달달함과 부드러움 사이에 술 향이 확 느껴져 웃게 되는 크리스마스 푸딩, 종이 왕관을 쓰며 즐거운 대화와 함께 하는 가족의 크리스마스, 뒤늦게 꾸민 크리스마스 트리에 하나씩 달아보는 오나먼트, 개구리소리와 매미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 깔리는 캐롤.


코로나가 끝나면 한국에 꼭 보내고 싶은 크리스마스 카드.


언젠가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기억이 한겨울의 크리스마스 기억만큼 쌓여보길, 매년 조금씩 추억의 상자에 이 더 많은 소중한 시간을 담아보길 소망해봅니다.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유자 마카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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