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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Mar 16. 2021

잘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이면 웃지만 스무 살의 나는 서른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일도, 인간관계도 적당히 잘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부모님께 꼬박꼬박 용돈을 드리고, 작지만 은행집 이어도 내 명의의 집에서 종종 친구들을 불러다가 제대로 한 끼 배불리 먹이고, 술 한잔을 기울이다가 그들에게 폭신한 이부자리를 언제든 펴줄 수 있는 여유, 그리고 금요일에는 야근을 하더라도 조금 피곤한 몸으로 차를 운전하며 밤바다를 달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해를 보고 집에 돌아와 주말을 시작하는, 가끔은 새벽 꽃시장에서 꽃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마음이 있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리고 서른 살을 이미 훌쩍 넘은 나는, 운전은 진즉 포기 했고, 밤 10시만 되면 졸기 시작하며,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고랑이와 새소리를 들으며 지구 반대편의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늘 넘치는 기운을 주고받았던 수많은 친구들 대신, 기본 4시간은 운전해서 가야 만날 수 있는 이 곳에서의 두어 명 친구와, 다섯 손가락을 간신히 꼽는 숫자의 친구들과 아주 가끔 연락하며 생활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와 연락을 했다. 어머니는 30년 넘은 서울 생활 끝에, 이모들이 계시는 작은 시골 도시로 이사를 하셨다. 살아생전에 연속극보다 더한 사건과 사고로 엄마의 속을 무던히 뒤집어대던 아빠 덕에 엄마는 남정네라면 치가 떨린다며, 다 귀찮다며 홀로 지내신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재작년 말에 정년퇴임 후, 코로나로 인해 더욱 집에서만 혼자 지내시던 엄마의 건강은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사실 작년 하반기부터, 한국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나면 내가 혼자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을 울어대는 통에 고랑이는 내 핸드폰에 울리는 국제 전화 소리만 들려도 긴장을 하곤 한다.


점점 아이가 되어가고,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어머니의 병세에 내가 먼 곳에서 처음 한 일은 엄마와 대화와 생활에 도움될만한 의학자료와 각종 사례들을 찾기 시작했다. 머릿속 시간이 뒤섞이기 시작한 엄마와 가장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음식' 만한 소재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전화하면서 이야기할만한 내용들을 생각해보고 적어보는 중, 문득 깨달은 생각에 나는 눈물이 났다.

바로, 엄마는, 지금도 내 몸하나 건사하며, 책임지는 것으로도 버거워하는 내 나이에 이미 나와 남동생을 낳고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잘 나이 먹고 있을까?

나에게 20대에는 '내가 이 나잇값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이었다면, 그리고 30대에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대답하며 살아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나의 로망과는 완전히 다른 30대의 삶을 살고 있고, 또 그중에 내가 가장 예상치 못한 부분은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라는 질문이 나에게 어느 날 훅 들어온 것이었다. 


그저 피곤을 좀 더 자주 느끼고, 온몸이 점점 뻣뻣해지고, 주름이 늘어가는 것만이 나이가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식을 키우고, 또 그 자식의 자식을 돌보기에 바쁜 부모님 세대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를 할 여유조차도 없다는 것을 내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법한 나이가 되어서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올해에도 한국에 갈 수는 없고, 감사하게도 좋은 친척분들이 어머니를 도와주고 있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조금 더 많은 분들의 사례를 접할수록 나는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쯤, 꼬마인 나에게 알려주었던 신문지를 깔고 티브이를 보며 콩을 까고 파와 콩나물을 다듬으며 보냈던 그 시간을, 키가 크려면 콩나물을 먹어야 한다며 억지로 남동생에게 콩나물을 더 먹어이려는 실랑이를, 엄마와 작은 떡시루를 시장에서 사 와 까만 비닐봉지를 꽁꽁 싸맨 뒤, 엄마와 열심히 물을 주며 집에서 콩나물을 키우던 작은 손을 가진 나를, 그 소소한 순간들을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정말 멀었던 남자와 신문지를 깔고 티브이를 보며 한국에서보다 5배는 비싼 금 콩나물을 하나하나 다듬으며 콩나물 국밥을 만들 준비를 한다. 고랑이는 여전히 숙주와 콩나물을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워하지만, 콩나물에서 우러나오는 그 깊고 깔끔한 맛을 맛보더니 한인마트에 가는 날이면 콩나물을 꼭 장바구니에 넣곤 한다. 그는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신문지를 펴서 콩나물을 쏟아놓으 뒤 나에게 물어본다. 


"콩나물 라면, 콩나물 무침, 콩나물국... 중에 오늘은 뭘 만들 거야?"

콩나물로 해 먹는 저녁 메뉴에 기대하며 신이 나서 이렇게 산더미 같이 쌓인 콩나물을 함께 다듬는 것에 번거로워하지 않는 이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가느다란 콩나물을 하나씩 조심히 다듬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웃곤 한다.


콩나물을 데치고, 지난번 김치하고 남았던 우거지도 해동하고, 새우젓도 꺼내고, 멸치를 넉넉히 꺼내어 육수를 끓이고, 다시 데친 콩나물을 무쳐서 밥과 함께 그릇에 담고, 계란을 따로 익히고, 토렴을 해서 내용물을 뜨겁지 않게 데웠다. 콩나물을 다 다듬은 고랑이는 육수 간을 보더니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다. 엉킨 실타래 같은 마음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풀어진다.



아마도 이렇게 얇은 종이 한 겹을 몰래 끼워넣듯한, 섬세하고 소소한 시간의 결이 나이가 들면서 한 층 더 풍부해져 자주 꺼내보고 싶어 지는 게 아마도 잘 나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시간들의 결 사이에, 내가 지금 보내는 이 소소하고 잠시 웃음이 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끼워 넣어 본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잃지 않는 것 또한 잘 나이 들어가는 것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답을 더해보기도 한다. 아, 물론 엄마 흉내만 간신히 내고 있는, 콩나물 다듬는 것도 가끔 귀찮아하는 나의 음식 솜씨가 더 그럴싸 해지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으면 그것도 잘 나이 들어가는 과정 중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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