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지 않은 케이크
달지 않은 디저트에 관한 논란은 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듯하다.
빵을 만드는 분들 중에서도 '달지 않으면 그게 디저트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달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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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키에리는 그 논란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쌀로 만든 케이크와 버터가 들어가지 않는 스콘은 극강의 담백함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맛으로 입소문이 났고, 수유에서 시작한 작은 카페는 빠르게 성장하며 이태원에 2호점을 냈다. 그렇게 굳건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카페 키에리는 유명 미식 프로그램에 "케이크 맛집"으로 소개되며 전국구 맛집으로 자리 잡았다.
방송이 롤링되는 중에도, 끝난 후에도 온라인은 꽤나 뜨거웠다. '너무 맛있다 VS 상상 이상으로 담백해서 어색했다', '친절한 사장님이 좋아 자주 가는 단골집이다 VS 불친절하다' 등등 각자의 생각이 다른지라 논란이 치열했다.
방송 이후 키에리의 컨셉은 크게 바뀌었다. 오픈 시간 전부터 긴 줄이 생기는 건 방송에 출연한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평소 회원제를 운영하고 싶어 했던 사장님의 뜻에 따라 키에리에는 멤버십 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 단골들은 '키에리 멤버'에 등록할 수 있었고, 그 혜택으로 오픈 한 시간 전 입장하거나 케익을 포장해 갈 수 있었다. 일반 손님도 각기 다른 날짜의 영수증 3개를 들고 가면 멤버가 될 수 있긴 했지만, 멤버십 제도를 통해 기존 단골과 사장님의 관계는 더욱더 돈독해지는 듯했다.
나는 키에리의 단골은 아니었지만 사장님과 인사를 나눌 정도의 안면은 있는 애매한 손님이었다.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채 단지 케익 맛에 이끌려 방문한, 정말 '손님'. 처음 문자를 받고 멤버에 가입하긴 했지만 자주 방문하는 편이 아닌 탓에 금방 일반 손님으로 등급이 하락했다. 하지만 멤버만 케익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긴 줄에 화가 날 정도로 키에리를 자주 찾는 것도 아니었기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처음 키에리에 갔을 때, 모든 게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태원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느낌의 위치, 사람이 많은데도 고요한 실내, 노키즈존이라는 글자, 무언가 강단이 느껴지는 사장님과 몸집은 작아도 한 성질 할 것 같은 강아지까지(사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공간을 가득 채운 특유의 분위기에 휩쓸려 발걸음도 사뿐사뿐, 말소리도 소곤소곤하게 되었다. 방송 이후에는 늘 웨이팅이 있어 지금은 그 조용함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땐 뭔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크지 않은 매장을 쭉 둘러보니 동그란 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쏟아지는 햇살과 이를 살짝 가려주는 베이지색 린넨 커튼이 푸근함을 더해주는 것도 좋았다. 냉큼 그곳에 자리를 잡고 함께 읽을 책도 세팅하고 나니, 이제 달콤한(x) 구수한(o) 케이크 한 조각만 있으면 완벽한 오후가 될 것 같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커다란 사이즈의 케이크들을 보는 순간 깊은 고뇌가 시작되었다. 대표 메뉴인 할머니 케이크도 좋고 고소함이 일품인 콩크림 케이크도 먹고 싶고. 향긋한 당근 케익과 독보적인 쌉싸름함을 자랑하는 쑥쌀케이크도 포기할 수 없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당충전이 될 것 같은 초콜릿 케이크(데빌스 케이크)도 맛깔나 보인다. 그뿐 만이 아니라 한눈에 봐도 꾸덕한 치즈케이크, 독특한 비주얼의 고구마 파이, 제철 과일이 올라간 케이크 등 시트 케이크 이외에도 다양한 케익이 있어 쇼케이스 앞을 떠나기 쉽지 않았다.
케이크를 고르고 나면 2차 번뇌가 시작된다. 냉장고 옆에 위치한 약 10여 종의 스콘들이 손짓하기 때문이다. 통밀100, 호밀 100, 귀리 100은 건강식 마니아들에게 인기가 좋고 무화과 스콘이나 초코칩 스콘 등은 부재료가 들어 좀 더 대중적이며, 자색 고구마, 쑥, 콩 등 한국적인 식재료를 이용한 스콘도 매력적이다.
날이면 날마다 방문하는 키에리가 아니니 케이크는 먹고 가고, 스콘은 넉넉하게 사서 포장하기로 했다. 스콘의 경우 며칠 정도는 두고 먹을 수 있는 데다 냄새도 거의 나지 않으니 간식으로도, 한 끼 식사로도 참 훌륭한 아이템이라며 합리화를 해 본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가 등장했다. 높은 가격대로 인해 느꼈던 서운함이 한 번에 녹아내리는 넉넉한 사이즈의 케이크다. 각각의 재료가 들어가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하는 도톰한 시트에 동물성 생크림 한 겹, 또 시트 한 겹, 생크림 한 겹. 차곡차곡 쌓인 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예쁘게 사진을 찍고 크게 한 포크 떠 보려는데 어쩐지 쉽지 않다. 시럽을 머금어 촉촉한, 카스테라 느낌의 일반적인 시트와 달리 키에리의 케이크는 무언가 탄력이 느껴지는 빵이다. 시럽도 거의 발라져 있지 않아 누군가는 뻣뻣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케이크. 쑥 케이크의 경우에는 쌉싸름한 향과 쑥 섬유질 때문에 식감이 더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케이크가 진입장벽에 높은 건아니다. 콩크림 케이크 같은 경우에는 구수하고도 정겨운 향이나 처음 키에리를 맛 본 친구들도 맛있게 먹는 편이고, 치즈케이크 역시 묵직하고 꾸덕하면서도 많이 달지 않아 쉽게 질리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달지 않고 깔끔해서 빈 속에 먹어도 부담 없고 든든한 키에리의 케이크. 클래식한 느낌부터 고구마, 쑥, 무화과 등 시즌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 메뉴까지 있어 비싸다 생각하면서도 계속 가게 되는 곳이다.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 맛있는 걸로 한 주를 이겨 내기 위해 키에리 스콘을 꺼내 본다.
일반적으로 스콘이라 하면 버터 듬뿍 넣어 비스킷처럼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타입이거나 생크림으로 만들어 부드럽고 묵직한 타입을 떠올리지만, 키에리는 스콘 또한 "키에리스럽다".
단맛이 거의 없어 호불호가 갈리고 쿠키처럼 꽤나 단단한 식감이다. 퍽퍽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매니아층이 두터운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입안 가득 느껴지는 거친 식감과 묵직한 맛, 식재료 고유의 향과 맛이 달달함의 부재를 채운다. 호밀이나 통밀, 귀리 스콘은 평소 건강빵 성애자인 나도 놀랐을 정도로 거친 맛이었지만 조금 달달한 두유를 곁들이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어 준다.
노키즈존, 멤버십 제도, 단호한 성격의 사장님, 극강으로 담백한 맛 등 키에리의 시스템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무엇이든 '그곳만의 색깔'에 열광하는 나는 키에리가 좋다.
건강상의 이유, 체질적인 이유, 다이어트를 이유로 디저트를 즐기지 못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준 것도, 쑥, 콩, 고구마 등 한국적인 재료를 키에리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도 좋다. 딸기, 무화과와 같은 재료를 이용해 계절을 담아내는 모습과 무엇보다 '디저트=달다'라는 무언의 공식을 깨트려 준 그 참신함이 좋다.
수없이 많은 디저트 가게 틈에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 온 달지 않은 디저트 가게 키에리.
원래 호불호 갈리는 것 중 '호'편에 서게 되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데. 키에리가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하나) 3명 이상은 입장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인원이 너무 많을 땐 포장을 추천드려요!
둘) 스콘은 정말 쿠키 같아서 쉽게 부서져요. 나눠 먹을 땐 뚜껑을 열 듯 가로로 들어 올리면(?) 한결 깔끔하게 드실 수 있습니다.
셋) 건강한 맛을 즐기지 않는 분들이 시라면 초코 케이크나 치즈케익으로 먼저 시작해 보세요. 콩크림도 고소하니 무난하게 맛있습니다. (쑥은 가장 나중에 시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