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일의 기분 Nov 06. 2019

주간 ㄱㄷㅎ 4-1

1.

또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었다. 


민방위 훈련을 가는 날이라 회사에는 휴가를 냈다. 2시에 훈련이 시작되어서 1시쯤 집을 나서는데, 아직도 날이 추운 듯 해서 경량 패딩을 입었다.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보면 반팔만 입고 다니기도 했던데, 올해는 왜 이렇게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겨우내 춥지 않고 지나갔던 것의 여파인지.


민방위 훈련장은 마을버스를 타고도 종점까지 가야 하는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추운 날씨에도 벚나무, 개나리들이 꽃을 한껏 피우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와 환승을 하려고 하는데,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이 아깝고 민방위 훈련장에서 앉아만 있어 운동량도 부족한 것 같아 집까지 걸어갔다. 20여분을 걸어가는데 상쾌한 느낌의 공기가 정말 기분이 좋았다. 활기찬 하루를 보내니 입맛도 돌아, 집에 와서 밥을 양껏 먹고 나서 과자까지 먹었다.




2.

지난 주의 주간 일기를 정리하며, 주간 일기를 얼마쯤 썼나 세어보니 벌써 반 년 가까이나 되었다. 매일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게 싫어서 쓰기 시작한 일기였지만, 막상 일기를 쓸 때에는 적을 게 없어서 어떤 것을 적을지 짜내곤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겹치다보니 이렇게 일기가 쌓이게 되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 하루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일기를 쓰기 전에는 오늘 했던 생각들이 내일이나 모레쯤되면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재밌는 것들을 생각하곤 했는데.'하는 아쉬움이 남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이렇게 흘려 보내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기록했다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일기를 쓰면서는 그런 사소한, 흘러가는 생각들을 조금씩이나마 붙잡아 두는 것 같아서 좋다. 


물론 이렇게 했지만서도 또 한 주 별 생각없이 일하고 출근하다보면 또 일기를 정리하는 일요일이나 월요일 쯤에는 '지난 주엔 뭔 생각을 했더라' 싶지만 말이다.




3. 

근 2년 정도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 둘과 만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한 해에 한 두 번 쯤은 보던 사이였으나, 한동안 소원했다가 친구 중 하나가 먼저 연락을 해서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간만에 사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는데, 만나고 나서 집에 오니 무언가 새롭고 강한 자극을 받은 느낌이 들어 놀랐다. 자주 볼 때는 변함 없는 친구들 같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다들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한 친구는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함께 하고 있는데, 만나기 전에는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산다'고 쉽게 판단했는데 일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도 나름대로 절박하고 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는 회사 일 이외에도 다른 일을 하며 주말까지 일을 하고 자신이 하는 분야에 꾸준히 공부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가장 자주 보는 회사의 동료들은 대부분 타성에 젖어 적당히 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나 포함),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모습들을 보니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아닐까. 자주 볼 때는 맘에 안 드는 점이 많이 보이던 친구들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위인이 되어 있구나.




4.

첫 회사를 그만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어떠한 '사건' 때문이었다.


첫 회사는 2금융권의 은행이었는데, 작은 지역을(동 단위) 기반을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2금융권에 대출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보통 1금융권의 메인 은행에서 대출을 하기엔 신용도가 떨어지거나, 1금융권보다 훨씬 큰 액수의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이었다.(간단히 말해 상황이 더 좋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대출 이자를 연체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회사에 입사한지 두어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내가 있던 곳의 지점장이었던 모 차장이 나를 불렀다. 겨울이었고, 해가 진 저녁이었다. 지점장이 하는 말인 즉, 우리 지점 근처 아파트에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한지 몇 달이 지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가서 그 사람이 있는지 살펴 보고 있으면 갚으라는 말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대신 돈을 주고 곳이 회사이니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말하고 지점을 나섰다. 아파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가는 길이 구역만리 먼 길처럼 느껴졌다. 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앞이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마음이 들지 않아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제발 집에 사람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대출자가 사는 000호에는 사람이 있었다. 현관문 옆 작은 창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 앞에서 5분쯤 서 있다 차마 벨을 누르지 못하고 다시 지점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소리에 차마 벨을 누르지 못했다"는 나에게 지점장은 가볍게 웃으면서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어떡해." 하고 말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별다른 꾸중 없이 넘어갔다.


물론 돈을 빌려서 갚지 않은 사람의 잘못이 크다는 것은 나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둘 중 잘못을 따지자면 그것은 '대출을 받고도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의 탓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이렇게 돈을 버는 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사건은 내가 첫 회사를 그만 둔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지만, 여러 이유 중 하나쯤은 된 것 같았다.




5.

TV를 거의 보지 않고 살고 있는데, 오랜만에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하나 생겼다. 바로 <스페인 하숙>이다. 나도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주요 등장인물 세 사람이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 되도록 꼭 챙겨보고 있다.


세 등장인물 중에는 특히 배정남을 보며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점도 그렇지만, 외국 사람들에게 격의 없이 말을 거는 모습이 가장 멋지고 인상적이었다. 배정남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그닥 잘 하지 못하지만, 장을 보거나 할 때 사람들을 만나면 늘 거림낌없이 다가가 몇 마디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먼저 인사를 하곤 한다.



7~8년 전쯤 일본어를 잘 하는 친구와 일본에 간 적이 있었다. 가기 전에는 친구를 많이 의지하고 갔지만, 막상 친구의 일본어 실력에 도움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친구가 극도의 수줍음을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한국어로도 한국 사람에게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일본어로 일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 더욱 어려운 일인 듯했다.


결국 무언가 물어볼 일이 생길 때마다 이상한 촌극을 벌이곤 했다. 우선 내가 어설픈 영어로 일본인에게 먼저 이야기를 하면, 일본인이 일본어로 대답을 한다. 친구는 그 일본어를 알아 듣고 나에게 한국어로 뭐라고 했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나는 그걸 다시 어설픈 영어로 일본인에게 말했다. 

(설명만 해도 정말 기이한 일처럼 느껴진다.)



수능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가 곧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라는 인식이 있다. 오로지 문제를 잘 풀기 위해 우리는 외국어를 공부한다. 하지만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진정한 이유는 '외국인들과 이야기, 소통을 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어를 잘 하는 친구는 외국인과 소통을 못했지만,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 배정남은 누구보다 외국인들과 소통을 잘 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매주 배정남의 태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곤 한다.




6.

천주교를 믿기 전부터 여자친구를 따라 종종 성당에 간 적이 있다. 미사는 대체로 지루했지만, 좋아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건 바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비천주교인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평화의 인사'란, 미사 중 성체(밀떡)를 모시기 직전 신자들끼리 서로의 '평화'를 비는 의식이다. 보통 기도손(합장)을 한 뒤 서로 고개를 숙여 하느님께, 그리고 신자들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지금도 나는 미사 중 이 시간이 가장 좋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평화를 비는 인사를 할 때면 모두가 웃게 된다. 엄숙했던 성당 안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이 짦은 웃음을 나누는 순간이야말로 '종교를 갖는 것'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7. 

어제는 별로 안 추울 줄 알고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는데, 오후에 비까지 오는 바람에 날씨가 생각보다 더 추워져서 종일 덜덜 떨었다. 


그러고 나서 딱 하루가 지났는데, 오늘은 종일 날씨가 무척이나 따뜻했다. 외투를 벗고 맨투맨 하나만 입었는데도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날씨 변화가 참 극적이다. 좋은 날씨에 미세먼지까지 없어 꽃놀이를 가고 싶어 여기 저기를 찾아보다가 결국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해 늘 가던 서촌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평소 걷던 길과는 다른 골목으로 가서 멋진 가게를 구경하기도 했고, 어제도 갔던 단골 카페에 이틀 연속 들러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이불의 커버를 빠는 뺄래를 했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잘 마른 커버를 끼웠다. 밤에 입고 자는 맨투맨이 더워 벗었고, 반팔로 갈아 입었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올해 봄은 4월 7일에 온듯하다.




이전 13화 주간 ㄱㄷㅎ 3-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