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매일 안 써도.
내 어렸을 적 일기에 대한 기억은 아주 강렬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방학 숙제로 그림일기를 써오도록 했다. 그때 당시에도 나는 미루는 것에 익숙한 아이였다. 매일 일기를 써도 못할 마당에 나는 매일 친구들과 노느라 일기 숙제를 미루고 있었다. 아빠가 ‘일기 숙제 했니?’ 하고 물어보면 나는 ‘네, 잘하고 있어요.’ 하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날. 나는 지난 한 달간 아빠에게 해온 일기를 쓰고 있다는 거짓말을 무마시키기 위해 밀린 일기 숙제에 최선을 다했지만 일기 숙제를 다 끝낼 수는 없었다. 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났고 그걸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더 어려웠다.
호랑이 아버지는 내가 일기숙제를 하지 않은 것보다 한 달 내내 거짓말한 것에 더 화가 나셔서 밤늦게까지 혼을 냈다. 아빠에게 파리채로 맞은 내 종아리는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꺼억꺼억 울면서 학교를 갔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일기를 조금 쓰기는 했지만 대부분 나의 사춘기 감정들이 꾸며지지 않은 채로 적나라하게 뒤죽박죽 나열되어 있는 일기장을 볼 때면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래서 나중에 다 태워 버렸다.(지금 생각하면 참 후회되는 부분이다.)
그 이후로 제대로 일기를 쓴 것은 2001년 대학 중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일 년을 봉사할 때였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고 전기도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은 대나무 침대에 누워서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아마 내가 가진 일기장 중 가장 빽빽하게 그리고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해가 바로 그해일 것이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생활 동안에 쓴 일기장은 일기가 아니라 거의 월기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일기장은 몇 년에 걸친 일기들이 띄엄띄엄 쓰여있었다. 그리고 인도에 왔다. 인도에서도 일기를 쓰기는 했지만 매일 정기적으로 쓰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아이들이 있었고 주부였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 많은 일기를 써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다 저녁이 되면 나는 골아떨어졌고 일기를 쓸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띄엄띄엄 그래도 일기를 썼다.
그러는 중에 핸드폰 앱을 알게 되었고 나는 핸드폰에 일기를 쓰느냐 아니면 일기장에 볼펜으로 일기를 쓰느냐를 한참 고민했다. 그때 고수리 작가님이 10년 일기를 쓴다는 글을 읽었다. 10년 일기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다시 윤혜은 작가님의 책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이라는 책을 알게 되고 그 책을 읽으면서 10년 일기장을 구매했다.
그렇게 2023년 7월 8일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0년 일기의 장점은 길게 쓸 공간이 없다는 것과(그래서 짧게 쓸 수밖에 없다) 같은 페이지에 같은 날짜의 10년이 들어 있어서 전에 있었던 일들을 읽는 것이 은근히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윤혜은 작가님은 10년을 빠지지 않고 다 썼다고 했지만 나는 미루는 것을 무척 즐겨하는 일명 ‘미루니’였기 때문에 10년 일기장에도 공백이 꽤 생겼다. 게다가 10년 일기장이 커서 여행을 다닐 때는 들고 다니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중간 공백이 생겨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내년에 쓸 수 있는 공간이 두 칸으로 늘어난 것이니까.(올해 쓰지 못한 부분은 내년 같은 날 쓸 때 좀 더 많이 써서 채워 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또 나의 신념을 나누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 꼭 잘해야 하나요? 꼭 성실하게 다 일기를 써야 하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난 사람인가요?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내가 즐겁게 일기를 쓰다가도 가끔 쉴 수도 있는 것이다. 여전히 기록한 다른 날을 보며 나 자신을 칭찬해 주면 된다.
하지만 최근 나는 자랑스럽게도 두 달 정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가끔 딱 4줄 정도밖에 못 쓰는 일기 공간이 부족하면 다른 일기장에 좀 더 긴 일기를 쓰기도 한다.(한 달에 한 두번)
이렇게 일기를 빠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은 지인들과 매달하고 있는 도전 덕분이다. 매일 자신이 정한 목표를 밴드에다가 인증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도전 인증 시스템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함께 하는 지인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인증이 없는 우리 삶은 상상할 수가 없다.’
매일 일기를 쓰고 인증을 누를 때 그 기쁨, 일기를 쓰기 싫은 날도 밴드 인증을 빠지고 싶지 않아서 기어코 일기장을 펴고 앉는 기이한 현상을 나는 요즘 경험하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짧지만 하루 동안 경험하고 느낀 나의 일과 감정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을 기록해 두는 것. 그것은 매일 나의 하루라는 긴 책을 읽고 요점 정리해 주는 독후 감상문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때로는 내 속상한 마음을 일기장에 쓰면서 위로받기도 한다. 꼭 누군가에게 내 억울한 상황을 힘든 상황을 고자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미래에 읽을 나에게 ‘나 이만큼 힘들었어. 나 정말 억울했어. 나 너무 뿌듯해.’ 이런 이야기들을 남겨두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문보영 작가는 말했다.
‘일기는 시간을 건너게 한다’
일기는 시간을 건너게 한다. 맞다. 나는 2024년에 살고 있지만 2001년에 필리핀에서 일기를 쓰고 있던 나를 만나고 2011년 인도에 갓 도착해서 마음을 쓴 나를 만나고 2015년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를 만난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2024년도 일기를 쓰며 즐거워하는 나를 만나게 되겠지.
우리 모두의 삶은 하나의 영화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살지 못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우리의 하루하루를 아주 짧게라도 기록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뿌듯해진다. 나의 일기생활은 중간중간 쉬어가는 시간도 있겠지만 가능한 지속할 것이다.
매일 쓰지 못해도 괜찮다. 시작이라도 하자. 그리고 한 줄이라도 쓰자! 여러분의 일기 취미 생활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