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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Feb 17.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8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0

  <탈출까지 D-93~D-71:번따새의 헌팅기 1/오일쉐어(카풀) 구하기>



  <학업에 대한 열망 하나로 산 넘고 물 건너 십리를 걸어간 학생처럼>

  양공장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수였다. 차를 사서 타고 다니거나 남의 차를 타고 다니거나. 하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도망갈지도 모르는 처지에 차를 살 수는 없었다. 오일쉐어(카풀)가 잘 구해지는 것도 아니어서 우버를 타야만 했다. 5분 거리에 평균 18불이라는 비싼 금액이었지만 우버를 탈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심야 시간에 일하는 유일한 기사인 나단이 쉬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택시비는 우버비의 두 배였다.

  돈 못지않게 택시 예약 전화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였다. 택시가 늦게 도착하기라도 하면 양공장에도 전화를 해야 했다. 뱉을 수는 있어도 알아듣지는 못해 '나 영어 못해서, 다시 말해줄래?'를 앵무새처럼 몇 번이고 말했다. 통화를 해야 함을 인지한 순간부터 스트레스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전화를 끊고 나면 맥이 탁 풀림의 반복. 당연하게도 내가 모든 영어와 관련된 일을 전담하는 게 가끔은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에이비씨디 수준의 영어 구사자와 함께하면 아이 엠 어 보이 수준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을.

  더보에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 버스. 하지만 배차 간격은 경기도가 울고 갈 정도였다. 마치 전설 속 동물처럼 길거리에서 버스를 찾아보기란 통 어려웠다. (참고로 더보 버스는 현금만 받는다.) 그 말인즉슨 노예들만 이용하는 양공장행 노선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되지 않느냐?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나는 더보에 있는 내내 별에 별 일을 겪으며 광기로 물들어갔기에. 가난한 시절에 배우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십리를 걸어 학교에 갔다는 사람도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있나? 공부가 하고 싶은 순수한 학생과 달리 나는 기본적인 출근권도 보장해주지 않는 양공장에 대한 증오만 품고 있었지만. 하지만 거리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시간에, 누가 죽어도 언제 발견될지 모르는 음산할 길을 걷기에는 위험이 컸다.(여담이지만 한 달쯤 후 퇴근 시간에 내게 우버를 어떻게 부르냐고 물은 신입 노예(여성)가 있었다. 그는 그 뒤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광기를 보여주었다.) 지점이 두 개나 있고 노예도 잔뜩 부리는 큰 회사가 셔틀버스도 없냐고 묻는다면, 없다. 그것이 플레처니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하루빨리 오일 쉐어를 구하는 것. 장기자랑이 하기 싫어 휴학했다는 일화를 들어본 적 있는가. 내게는 마냥 웃긴 이야기가 아니다. 극내향인인 내게 의무 교육 과정 곳곳에 지뢰처럼 존재했던 발표 시간은 지옥 같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기, 아쉬운 소리 하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으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하지만 더보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했고, 그럴 때마다 있지도 않은 외향성을 끌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이도 깎여 나갔다. 더보를 탈출하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그곳에서 모든 걸 소진한 나머지 내 안이 텅 비어 버렸음을.


  <번따새, 도믿걸, 그리고 나>

  오일 쉐어 구하기의 첫 번째 난관은 내가 곱창방 소속이라는 것이다. 골방에 처박혀있느라 친한 동료가 한 명도 없는 데다, 쏟아지는 곱창과 사투하느라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영어를 못했으며 사회성은 영어 실력보다 더 처참했다. 기억도 안 나는 유년기쯤에 사회성 장례를 치렀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번따새로 만든 곳, 더보. 이 세계관에서는 '못하겠어..' '안 할래..'가 통하지 않았다. 오직 '해야지!'만이 존재했다.

  나는 헌팅에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똥방의 이인자 뚱스틴비버가 곱창방에 들어왔고, 나는 대뜸 '하이'를 내뱉었다. 그가 부자재를 든 채 떨떠름하게 화답했다. 하지만 내게 스몰톡은 웅변만큼이나 어려웠다. 하이를 뒤따르는 공백을 바이로 메꿀 판이었다. 그래, 통성명을 하자!

  "왓츠 유어 네임?"

  "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듯이 뚱스틴비버는 곱창방에 이름만 남기고 나갔다. 졸지에 나는 그의 이름이 알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됐다.

  다음 타겟은 똥방 일인자인 썬오였다. 몇 안 되는 해맑은 노예인 그는 항상 내게 먼저 인사를 해줬기에 승산이 있었다. 나는 더듬대는 영어로 오일쉐어를 제안했고 그는 운전자인 형에게 물어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물어볼 타이밍만 노리는 와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홀로 남아 느릿느릿 칼을 정리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1분 1초가 아까웠지만 섬나라 귀신처럼 그는 똥방에, 나는 곱창방에 묶인 처지였기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됐다.

  "혹시 형한테 물어봤어? 안 물어봤으면 한 번 더 물어봐줄래?"

  "응. 알겠어."

  "우리 얘기할 시간이 없으니까, 문자로 알려줘."

  나는 그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초록 찌꺼기가 잔뜩 묻은 그의 손이 허공에서 머뭇댔다. 더럽지 않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찝찝함보다 간절함이 더 컸다. 나는 만져도 괜찮다는 걸 온 얼굴로, 언어로, 몸짓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손댈 수 없었는지 번호를 불렀다.

  "지로, 세븐, 지로..."

  한 세 자리 불렀을까... 그가 말을 멈췄다.

  "번호 까먹었어."

  그의 곤란한 표정은 구차한 변명과 더불어 내게 치욕감을 안겨주었다. 불현듯 홍대에서의 추억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친구와 밤거리를 걷다가 남성 2인조에게 술을 먹자는 제안을 받은 적 있다. 나는 나이를 묻는 그에게 40살이라 답했고, 내 남동생과 동갑이라는 그에게 '남동생 죽빵 때리기가 제 취미예요.'라고 했었다. 그 헛소리가 오늘날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급의 거절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구린 플러팅>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붙는 일들이 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심기처럼 헌팅 또한 그러했다. 전자는 숭고한데 비해 후자는 추잡스럽다는 점이 달랐지만. 그래도 헌팅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가난한 워홀러가 언제까지 우버와 택시로 출퇴근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다른 방 노예들이 곱창방에 오면 슬금슬금 다가갔다.

  "안녕?"

  일단 인사부터 뱉고 봤지만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차가 없어서 우버랑 택시로 출퇴근을 하고 있어, 혹시 네 차에 자리가 있으면 우리를 좀 태워줄 수 있겠니?' 완성형 한국어 문장은 영어로 변환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는 '노 카..' '뻑킹 우버..' 만이 둥둥 떠다녔다. 시간만 어색하게 흘렀고 나를 보는 노예의 눈빛에 압박을 느낀 뇌는 일단 지껄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너 차 있니?"

  "...?"

  "난 차 없어.."

  '어쩌라고' 들린다, 들려. 마음의 소리가. 마스크 껴서 밖에 보이는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읽혔다. 나는 황급히 우버를 타고 출근하는데 얼마나 비싼지, 돈을 지불할 테니 태워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안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쏘리, 아빠가 차를 태워주셔서...' '미안, 남는 좌석이 하나뿐이라.' '방향이 반대라서.' 빈 좌석이 두 개 있으면서 집 방향까지 일치하기란 쉽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각자 오일쉐어를 찾았으면 더 빨리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거절당할 게 분명한 부탁을 해야 한다는 막막함을 그럼 조금이라도 덜 느꼈을 테니. 한 장소에 붙박이처럼 서서 지나가는 여자란 여자는 죄다 붙잡고 '제 스타일이신데 번호 좀..'이라고 하는 번따새와 내가 다름이 무엇인가. 경멸당할 걸 알면서도 '조상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라며 제사를 권유하는 사이비와 내가 다름이 무엇인가. 사이비들은 거절당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모멸감 때문에 더욱 결속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헌팅을 시도하는 건 나뿐이었기에 거절에서 파생되는 건 '부담감' 뿐이었다. 둥지에서 입 벌리고 있는 뻐꾸기에게 줄 먹이를 사냥하러 나가는 어미새가 된 것 같았다. 앙상하게 굶주려 누굴 챙길 처지가 아닌데도 굴레를 벗지 못하는 어리석은 어미새. 그렇게 매일 어미새는 번따새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구린 플러팅을 날렸다. 안녕? 너 차 있니?


  -번따새의 헌팅기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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