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매년 12월 말이 되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다과를 먹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 해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얘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나의 한 해가 어땠는지 고백하는 것은 매번 부끄럽고 민망하다. 하지만 한 해 동안 힘들었던 일, 속상했던 일,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가족 앞에서 털어놓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 해가 정리되기도 하고, 동시에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이날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야기를 꺼낼 때의 민망함은 잠시 잠깐이고, 어느새 가족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살아가지만 정작 정말 아프고 힘들었던 속사정은 모를 때가 많다. 몰라줘서 미안하고, 잘 견뎌줘서 고맙고..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울음바다로 바뀌기도 하고, 겸허해지기도 한다.
한참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새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안타까운 건.. 작년 재작년에도 지키지 못했던 계획들을 올해 또다시 적는 것이다. 나는 주로 다이어트와 영어공부가 늘 항상 지켜지지 않고 반복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매년 새해 계획에는 ‘사랑을 표현하기’가 있었다. 아빠는 당신 자신을 돌아봤을 때, 사랑을 표현하는 게 매년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수줍게 고백하시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아빠는 그러시구나...’하고 넘겼다.
아빠가 돌아가셨던 해, 2016년 겨울은 내겐 유독 추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해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 해, 가족끼리 모여 앉아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고 싶지 않아 가족들은 그 자리를 굳이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가끔 혼자 아빠의 새해 계획들이 적힌 종이를 펼쳐 읽곤 했다.
아빠의 새해 계획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빠가 적은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사랑을 표현하기
아빠는 왜 해마다 이 문장을 새해 계획으로 적으셨던 걸까. 나는,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나는 아빠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사랑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빠는 이미 표정과 눈빛, 그리고 행동에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늘 묻어났기 때문이다. 집과 병원 말고 아빠가 주로 가시는 곳은 양평 두물머리 정도였고, 아빠가 환자를 보실 때 말고는 거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다. 나는 그런 가정적인 아빠가 좋았지만, 종종 ‘아빠 인생은 없고, 가족한테만 너무 희생하시는 건 아닐까.’라는 속상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도 없이 “아빠, 우리 걱정 말고 아빠 먼저 챙기세요. 아빠가 아빠를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라고 투박하게 말했다.
아빠의 그 새해 계획에 대한 궁금증은 몇 해가 지나고도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빠가 어떤 마음에서 그런 계획을 세우셨는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왜 당신 자신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을까. 모르겠다.. 그래, 내가 아빠 마음을 다 알면, 아빠지.’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잊힐 즈음, 나는 아빠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2020년이 끝나가는 어느 날, 흰 종이를 펼치고 앉아 한참을 집중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아빠의 마음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아빠는... 우리가 아빠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던 건 아니었을까.
아빠의 마음을 가족들이 몰라주어 든 서운함과 외로움을 당신 자신이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라는 자책으로 돌리신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아빠는 사랑을 표현하자고 했던 마음 밑바닥에는 가족들의 사랑이 고팠던 건 아니었을까. 아빠가 새해 계획에 ‘사랑을 표현하기’라고 적으실 때,
“아빠, 아빠가 우리한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셔도.. 아빠가 가족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다 알아요! 지금도 충분해요!”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데, 표현하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그건, 아빠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빠한테 ‘사랑해요..’라는 말을 해본 적이 언제인지... 아무리 기억해보려 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작 어버이날이나 생신날 카드에 적는 정도였으니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아빠한테 ‘사랑해요.’라는 말을 많이 해드리지 못한 게 너무 후회스러워 아빠한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엄마와 동생들한테 자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찌나 낯설고 민망한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그냥 웃어넘기거나 눈빛만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러고 돌아서면... 늘 아빠가 생각났다.
‘나중에 또 이 순간을 후회하겠지.’
그래서, 용기 내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 내 동생!” 그렇게 몇 번의 어색함과 몇 번의 민망함을 거치자 사랑한다는 말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 말에는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받는 게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엄마와 동생들도 내게 그 말을 수줍게 건네 왔으니까.
지금 우리 가족은... 아빠 덕분에, 아빠를 대신해서 아빠의 새해 계획이었던 ‘사랑을 표현하기’를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