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인 세상을 살아가는 법

육아의 중심에서 삶과 화해하다

by 딥마고



- 이언 : 아기 갖고 싶어?
- 루이즈 : 응, 그럼.

얼마 전 화제를 모은 영화 <컨택트Arrival>는 언어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한 언어학자 루이즈는 외계인의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오롯이 끌어안는 명상적 애티튜드, 혹은 헌신적 수용. 외계인 이야기로부터 어떻게 이토록 멋진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지 감탄하여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읽게 되었다. 이 단편은 다른 멋진 단편들과 함께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에 수록되어 있다.


테드 창은 SF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 수준으로 호평 받는 작가라고 한다. SF에 그리 친숙하지 않은 내가 읽어도 그의 소설들은 무언가 특별해보인다. 말하자면 판타지적 세계관에 철두철미한 과학적 근거를 갖다 붙여가면서 견고한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그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설명하듯 판타지는 "우주의 일부는 영원히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고, SF는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것을 가정하고 있다면, 이 둘을 한 이야기 안에 담아낸 그의 역량이란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보통의 SF가 대개 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데 반해 그의 이야기는 시간적 배경이 모호하다. 심지어 바빌론의 탑이나 천사의 강림 등 성서의 소재를 가지고 와 신에게로 가까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네 인생의 이야기>를 포함한 몇 개의 단편에서 작가가 관여하고 있는 주제는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읽힌다. <이해Understand>의 경우 친구가 읽던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세상 무엇을 보아도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이해>에는 정반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의미와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된 인물이 등장한다. <지옥은 신의 부재Hell is the absence of God>의 경우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관점에 따라 은총 혹은 형벌로 여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라 캐릭터들을 구성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는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해 사람의 얼굴에 한해서 아름다움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의학적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가정 하에 여러 인물의 논쟁을 펼친다. 그리고 <영으로 나누면Division by Zero>이라는 이야기에, 숫자 1과 2가 동일하다는 것을 결론에 도달한 가여운 주인공 르네가 등장한다.


1=2


이 작은 등식 하나가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테드 창의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주위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인격을 끌어내게 된다는 식의 증언을 마주하게 된다.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유창하게 하는 사람의 경우, 영어를 사용할 때는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발랄해지는 반면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낮은 목소리로 조금 무뚝뚝한 사람이 된다는 식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이렇게 사실 단일한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으로 나누면>은 <컨택트>의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영으로 나누면>의 르네는 <네 인생의 이야기>의 루이즈와 마찬가지로, 언어(등식)를 깨달음으로 인해 세상을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1과 2가 같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녀가 말하듯 이것은 그녀가 세상을 파악하는 언어와도 같은 수학적 사고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일 테다. 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의 구별이 사라지는 계기가 된다. 성공은 실패와도 같고, 손은 발이며, 베개는 구름, 창문은 시계, 머리카락은 액자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르네 마그리트, 꿈의 열쇠la clef des songes



학과 동료들도 이제 그녀를 피했다. 집중력도 사라졌고 어젯밤은 악몽까지 꿨다. 임의의 개념을 수학적 방식으로 번역하는 형식 체계를 발견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생과 사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르네는 끝내 무너져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낸 신학자'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무너진 체계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떠올렸다. 앞서 언급했듯 테드 창의 친구가 읽었다던 그 어려운 실존주의 소설 <구토>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 로캉탱은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이나 존재로부터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구토감을 느낀다. 그에게 세상은 원래 1=2인 부조리한 세상이다. 인간은 세상에 어쩌다 던져졌고, 세상 역시 어쩌다 인간 앞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 우연성, 이 무작위성, 이 당황감.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지만, 그 핵심에 있는 사상과 '구토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어떻게든 실존주의를 이해하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나는 미래를 '본다' - 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락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노파의 동작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문예출판사), p.64


이것은 권태일까? 권태라는 말로도 이 구토감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을 지나왔다. 배우 에단 호크가 소설 <웬즈데이>에서 인물들을 통해 묘사하듯이, 항상 삶 앞에서는 허전하고 어색해 쭈뼛거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탐욕스럽다. 지금도 그런 순간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딸, 학생, 백수, 여자친구를 지나 아내, 선배, 후배, 프로그램을 총괄해야 하는 PD라는 역할까지. 나의 수많은 면면들 중에서 때와 장소에 알맞은 모습을 그때 그때 꺼내어 사용해야 하는데, 나는 늘 본질에 관한 생각에 시달려왔다. 나는 왜 하필 이 곳에 이 시간에 이런 환경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이 역할들을 다 빼면 나는 무엇인가. 1은 2와도 같은데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들, 다 무슨 소용인가. 말하자면 나는 내게 주어진 삶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늘 소원했고, 늘 멀찍이서, 3인칭 시점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내 모습은 항상 연기를 지지리도 못하는 배우처럼 어색했다. 나 자신에게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적면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모키 화장을 하고 뾰루퉁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에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던 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아침 7시까지 클럽에서 음악을 듣지 않으면 삶이 주는 어색함을 해결하지 못하던 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미하다'는 일관된 애티튜드를 짐짓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자조하던 나. 소비사회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무의미를 급작스러운 '지름'들로 채우고선 허전해하던 나. 이런 나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엄마라는 역할이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보다 더 획일화된 상(image)을 가진 사회적 역할이 있을까? 엄마는, 특히나 한국의 엄마는, 뾰루퉁해서는 안 되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클럽에서 밤을 지새워서도 안 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좌절해서도 안 됐다. 살림의 여왕이 본인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립스틱을, 미니 스커트를, 클러치를 지른다? 안 될 일이었다. 미혼들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엄마의 세계란 이렇게도 지루한 것이었다. 회사 동료들도 나와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다 했고,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내가 평화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모습을 아직까지 어색해 한다. 나 역시 여러 역할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임신 8주차, 아직 배도 안 나온 나를 산부인과에서는 '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그 단어 앞에서 머뭇거렸고, 얼마간은 거부했다. 정체성이라는 단어조차 우습게 느껴졌다. 아기가 자아정체성이 형성될 즈음, 나처럼 존재의 우연성에 허무해하지는 않을까, 이 아이가 나에게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마음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배가 점점 불러올 때 나는 보부아르를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문장들에서 답을 보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꾸리에)


그녀의 문장들을 읽으니, 나는 '삶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는 문장에서 오로지 허무주의만을 추출해 핥고 빨면서, 그 오랜 시간을 시리게 보내왔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실존주의에서는 그 뒤의 문장이 중요한 것이었다. '삶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구토>에서 로캉탱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 즉 '기록된' 사람들의 흔적을 보고 구토감을 극복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존재의 흔적. 그리고 상대에게 도달해서 마침내 형성되는 의미. 이것을 발견한 순간, 그는 이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역시 예술의 형태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사르트르가 무의미한 삶에 제시하는 해결책이란,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의미를 스스로 생성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아도 사소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소명을 다하는 것이 구토감을 극복하는 길이다. 로캉탱이 르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며, 1=2라는 증명을 통해 그렇게라도 당신의 업적을 남기는 것이 그 좌절을 지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아기와 눈을 맞추고 아기가 내 얼굴을 보고 모방할 수 있도록, 웃어준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손톱을, 속눈썹을, 배꼽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큰 소리로 칭찬을 한다. 매일 같은 마사지를, 목욕을,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아기를 한 팔에 안아 그 쪽 팔이 저려오더라도 필사적으로 두 손을 움직여 강박적으로 읽고 보고 쓴다. 이런 하루들이 모여 어떤 역할이 주어지면 늘 머뭇대던 시린 나와 화해를 한다. 역할들의 총체가 본질이고 그 모든 역할들을 껴안아 사르트르의 충고대로 기록해두면 된다. 기록은 불안을 견디는 힘이고, 흔적은 남아 어디에선가 의미로 전환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과거로 돌려 남편과 다시 대화하게 되더라도 나는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남편 : 아기 갖고 싶어?
나 : 응, 그럼.




*이 글은 서대문마포은평 북클럽 '다독다독' 여섯 번째 모임을 가진 뒤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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