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육아는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말의 어떤 의미

by 딥마고

지난 글​에서 의기양양하게 ‘아무리 내가 일을 열심히 해도 내 딸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고 한다’고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역경이 찾아왔었다. 프로그램 개편을 준비하느라 평소보다도 퇴근이 늦었고, 집에 아예 못 들어오는 날도 전보다 많아졌다. 집에 와서도 피곤을 못 이기고 늘어지기를 2주 정도 지났을까. 평화가 슬슬 나의 등장을 꺼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엄마 싫어!’ ‘엄마 안 좋아해!’ ‘저리 가!’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곁에 가다가 거부당하기를 반복하면서 찜찜하게 며칠을 보내고 나서, 어느 날은 내가 안아주려는데 자지러지면서 거부하는 평화를 보고 나도 무너지고 말았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기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


그날 밤, 혹독한 자기반성이 시작되었고 일이 힘들다고 해서 집에 오자마자 쉬거나 잔업을 처리하기에 바빴던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일을 하느라 피곤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남편은 매일 8시 반까지 출근하기 위해 6시에 기상을 한다. 반면 나는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종이라 10시 반이나 11시쯤 집을 나서면 된다. 물론 아기가 잠들고 난 후 퇴근하는 경우도 많고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아예 다음 날 들어가는 일도 많지만. 부부의 이런 직업적 특성에 맞게, 나의 적극적 개입 없이도 육아 패턴이 남편, 시터, 할머니를 거치며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바로 다음 날, 나는 평화가 가장 좋아하는 공룡박물관에 가기 위해 단둘이 집을 나섰다. 엄마가 필요했을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곁에 없었던 서운함을 이렇게 거부함으로써 표현한 아기의 마음을 헤아리니,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그날부터 돌아선 아기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시작됐다. 필사적이라고는 하지만 디테일의 차이였다. 놀아주는 게 아니라 함께 노는가. ‘정말로’ 어떤 활동을 함께 하는가. 퇴근 후 핸드폰 확인할 시간 없이 바로 딸에게 달려가는가.


디테일이 변하니 관찰의 깊이도 달라졌다. 관찰을 통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놀이를 찾아냈다. 평화가 OTP기계를 눈에 대고 김치~ 찰칵, 하던 걸 기억해내고 나무로 된 장난감 카메라를 사주었다. 2019년에 필름 카메라처럼 눈을 뷰파인더에 대고 사진 찍는 시늉을 하는 아기를 보니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그리워졌다. 매일매일 16:9 비율의 직사각형 안에 어떤 그림을 넣을지 고민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기념할 법한 순간에만 아이폰 카메라를 켜는 생활이 아쉬워졌다. 소위 ‘감성 똑딱이’로 불리는 간단한 디지털카메라를 사게 된 계기다. 핸드폰 카메라가 아닌 오로지 사진만을 찍는 기계가 생기고 나니, 업무로서 촬영할 때가 아니어도 세상이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담겨 보일 때가 많아졌다. 직업적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적 즐거움. 일상적인 순간의 적극적인 기록.

핸드폰 카메라로는 기록하지 않을 순간들.

또, 종이컵이나 색종이를 잘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놀이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 부엉이, 문어, 나비. 사소하지만 소중한 물건들. 물감과 붓을 새로 사고, 아이와 함께 ‘물감놀이’를 자주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물감놀이다. 그 자체의 즐거움 외에 아무런 목적이 없는. 심지어 결과물로 어떤 멋진 것이 나오는지 전혀 상관이 없는 활동을 하다 보니 어떤 치유의 순간까지 맛볼 수가 있었다. 아이와 함께, 아이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그 고요가 나에게 찾아오기가 쉬웠던가. 소위 ‘덕후’라 칭해지는 분들의 순수한 즐거움을 나는 누리지 못하는 야트막한 종류의 인간이었거늘, 아이에게 집중함으로써 평범한 것도 감탄의 대상이 될 줄이야.

아이와 함께 내가 한 놀이의 결과물.
종이컵 문어 :)

봄이 되자 평화는 알록달록하고 각양각색의 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식물에 물을 주고 ‘맛있게 먹고 쑥쑥 자라’라고 말하는 게 어찌나 예쁜지, 아파트 화단에 있는 꽃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거실에 커다란 몬스테라와 꽃화분 몇 개를 사서 놓았다.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을 돌보는 일에 젬병인 우리 부부인지라 우리 집에서 살아나간 식물이 없는데, 꽃에 물 주는 걸 사랑하는 아기 덕에 이렇게 살아있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게 됐다. 사진으로 일상을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이유도 없이 미술활동을 하며 꽃을 바라보고 살게 된 게 다 아기에게 눈을 맞춘 결과다.


딸이 직접 똑딱이를 들고 찍은 화단 사진.

예전부터 엄마는 나에게 ‘육아는 양보다 질’이라며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짧은 시간을 함께 하더라도 얼마나 아이에게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함께 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봐야 어영부영 자기중심적으로 어른의 삶을 산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인 듯하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아이의 삶이 당당하게 갖는 무목적성을 누리다 보면, 육아의 질뿐 아니라 양육자 본인의 삶의 질이 함께 상승하는 효과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현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현대의 사회인으로서는 접하기 힘든 그 찬란한 경험.


아, 물론 새벽에 깨는 아기를 달래느라고 육체가 피로한 것은 논외로 한다. :)


ps. 그래서 딸의 마음이 돌아왔느냐 묻는다면 매순간 바뀌는 그녀의 마음을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하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엄마를 필요로 한다는 걸 명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keyword
이전 11화‘남아용 공룡 캐릭터’와 정준영 사건의 연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