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의 에바, <라우더 댄 밤즈>의 이사벨
평화를 낳고 나서 엄마로서의 여성을 두드러지게 묘사한 영화 속 캐릭터들이 다시 떠오른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그야말로 악마 같은 아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던 틸다 스윈튼. 그리고 물론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국민 엄마의 이미지를 우습게 뒤집은 김혜자. 또 가장 최근에 본 <라우더 댄 밤즈>에서 카메라를 통해 정면으로 내 눈을 바라보던 이자벨 위페르.
세 개의 영화 중에서 오늘 손 닿는대로 <케빈에 대하여>와 <라우더 댄 밤즈>를 다시 보았다. 처음 보는 영화들이 아닌데도 새로웠다. 이미 스스로의 이름으로 온전히 완성되던 그림에 엄마라는 퍼즐조각이 하나 더 생겨버려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끼워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이 두 여자들의 이야기가, 얼마 전 엄마가 된 나에게 전과는 다른 시선을 주었기 때문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끔찍한 현대적 재해석이다. 엄마를 향한 케빈의 사랑은 엄마의 세상에 자신만을 남겨놓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된다. 어릴 적 엄마가 읽어준 로빈 훗 동화는 장난감 활을 거쳐 진짜 활을 다루는 능력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얻은 능력으로 케빈은 고등학교 체육관에 있던 모두를 활로 쏘아 해치고 아빠와 동생까지 제거한다. 그리고 사실은 케빈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 에바는 케빈의 방식에 휘둘리면서 버둥대다가 케빈이 원하는대로 파멸하고 만다.
한편 <라우더 댄 밤즈>의 이사벨은 유명한 종군사진기자로, 많은 이들에게 숭고하다 여겨지는 삶을 산다. 그녀는 아들들을 사랑하지만 자기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행기를 네 번 타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에서 위험한 일을 하면서 가정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도, 가정으로 돌아오면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가정보다는 더 넓은 세상이고, 세상을 무대로 일을 해야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렇게 여기에 엄마됨을 불편해하는 두 여성이 있다.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안겨주는 질문은 모성애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새끼를 보호하는 여러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모성애가 본능이라고 배운다.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십중팔구 어미이지 아비는 아니다. 여기에서 아빠의 자리는 없거나 아주 작다. 잘은 모르지만 포유류의 경우 암컷이 젖을 통해 새끼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젖을 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킨십이 자연스레 애착을 형성한다고 믿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인간 여성에게도 같은 프레임이 덧씌워진다.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는 역시 위대해'라는 모성애 신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자기 새끼지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여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과 달라서 새끼를 돌볼 때 필요한 것이 아주 많다. 본능 이외에 엄마에게 문화적으로 요구되는 것, 또 신생아를 돌볼 때 습득해야 할 의학적, 관습적 지식 등을 서서히 갖추어야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미묘한 부분에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엄마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하지 않는 건강한 정신, 그리고 아이가 커가면서 발전하는 정서적 교감 등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엄마와 아이를 건전하게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두 영화가 두 가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인간의 경우 모성애는 타고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 사회는 가정에서 아빠의 역할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엄마 에바의 커리어다. 케빈이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그녀가 일하던 사무실과 책상 앞에 앉은 그녀의 자세는 언뜻 보기에도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자의 그것이다. 반면, 케빈이 끔찍한 일을 벌이고 난 후 엄마는 그런 악마를 낳고 길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거리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싸대기를 맞아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하는 '마녀'로 전락하고, 동네의 허름한 여행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복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은 케빈이 원하는 일이다. 서점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엄마의 얼굴과 화려한 수식어('이 시대 최고의 모험가'), 그것이 대변하는 엄마의 '중요함'은 자신에게서 엄마를 앗아가기 때문에, 엄마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케빈의 욕망이다. 만일 모성애가 타고날 수 있는 것이라면, 에바는 사회적으로 떳떳하고 화려하게 우뚝 서 있는 자신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아들에게도 끝까지 헌신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관계는 쌓아나가는 것이다. 에바에게도 케빈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동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케빈의 잘못된 사랑은 에바가 아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기에는 너무 잔인했다.
이사벨의 경우를 보자. 이사벨 역시 똑같이 시대로부터 찬사를 받는 여성이다. 그녀의 아들 콘래드는 외롭고 독특한 아이지만 반짝이는 글쓰기 솜씨를 갖고 있다. 동물의 사체가 부패하는 영상을 모으는 취미가 있지만 이것이 그가 '학교에서 총기난사'를 할 거라는 징조는 아니다. 케빈의 경우보다 엄마의 빈 자리가 훨씬 큰데도,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악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랜 기간 자신의 곁을 떠나 있었던 엄마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하고, 엄마가 죽고 난 후에도 그 품을 그리워한다. 그런 아들에게 이사벨은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때뿐이다. 이사벨의 '모성애'는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큰 열정을 뛰어넘을만큼 커지지는 못했다. 만일 모성애 신화의 프레임대로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자식의 일에 만사를 제치고 달려오는 존재라면, 이사벨은 죄책감 때문에라도 일을 그만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오지로 떠난다. 그녀의 외도상대이자 동료였던 남자는 그녀가 엄마로서 직무유기하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하듯 증언한다.
케빈과 콘래드는 둘 다 엄마를 갈구하지만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 나는 두 영화의 경우에서 이 차이가 아빠에게서 온다고 보았다. 에바의 남편은 갓난 아기인 케빈의 울음소리가 유달리 크고 끔찍하다는 아내의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 아들을 '그냥 살짝 흔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평범한 아이로 취급한다. 그는 커리어와 함께 파멸되는 에바를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고 케빈과의 관계를 호전시키지 못하는 그녀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보라'며 외롭게 몰아세운다. 반면, 이사벨의 남편은 '중요한 일'을 계속 하고자 하는 아내를 위해 연기자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한다. 또한 아내이자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들들과 끊임없이 노력하고 소통한다. 결과는? 위에 서술한 스토리와 같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부성애를 타고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부성애가 만들어진다고 말해도 비난받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직접 배에서 기르지 않고 낳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동물과 동일시한 시선이다. 인간의 모성애는 아이와의 정서교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부성애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둘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아빠의 역할은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돈을 벌어야 해서가 아니다. 남성이 경제적인 측면을 전담하고 여성이 가사노동과 아이와의 정서적 교감을 전담하는 시대는 지났다. 가정의 정서적 측면에서 아빠를 배제한 결과를 보라. '자식은 엄마만 찾고 아빠랑은 말도 안 섞으려 한다'며 자기를 연민하는 남성들이 넘친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역할분담은 제외하더라도, 인간의 모성애와 부성애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감정에는 양부모 모두에게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라우더 댄 밤즈>에서 이사벨은 사진의 어떤 부분을 가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가르친다. 프레임 바깥에 각자의 비밀이 있다. 케빈의 엄마 에바에게는 아들을 사랑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는 비밀이, 콘래드의 엄마 이사벨에게는 아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비밀이. 가려진 부분을 걷어내고 모든 가족구성원이 온전한 그림을 공유하자.
덧. 마초편향적인 한국 영화판이야 말할 것 없고 외국을 아울러도 여성, 특히 이삼십대가 아닌 중년 여성을 주 캐릭터로 삼는 영화가 극히 드문 이 테스토스테론 월드에서 괄목할 만한 여성 영화 리스트를 작성해 감상을 기록해야겠다. 나에게는 이런 일상적인 노력이 온전한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