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로부터, 미래를 배우다
아빠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 엄마가 그랬다. 나는 그게 변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아빠는 아빠가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 일자리를 잃었다.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셨는데 어떤 일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쓰고 나오게 된 후로 다시 일을 구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60년대였다.
그때부터 고생문이 열렸다. 아빠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야말로 ‘내팽겨쳐졌다’. 고모들은 바로 생계전선에 투입되어 봉투 붙이는 일 등을 했다. 학교도 못 가고 고향에서 고모들과 고생하던 아빠를, 12살 차이나는 큰아버지가 본인이 있던 서울로 데리고 와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장학생으로 합격한 서울사대부중을 졸업한 후에는 다시 앞길이 막막해졌다. 큰아버지는 집안의 그 모든 똑똑한 누이들을 건너뛰고 사내인 우리 아빠에게만큼은 대학진학을 권했다. 큰아버지의 격려로 아빠는 검정고시를 치렀고, 4년 장학금을 모두 받는 조건으로 한 대학에 입학했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어릴 적에 남들처럼 부모님이나 형제에게 예쁨 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렇다’는 의미를 어버이날, 아기를 낳고 부모가 된 후 새로이 획득한 관점으로 기록하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꽤 보편적인 세대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에 대해 별로 큰 불만도, 어떤 격한 감정이나 혼돈스러운 판단도 없다. 그것은 아무래도 아빠가 그만큼 가족구성원들과 꽤 거리를 유지하고 산 탓일게다. 가끔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때면 꼬장꼬장하고 매사에 비난조인 대화방식 때문에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워낙 본인의 세계가 견고하고 그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귀찮게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식 입장에서 공존하기 어렵지는 않은 타입이다.
하지만 그만큼 아빠와의 행복한 추억도 없고 애틋한 감정도 없다. 아빠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것에 소질이 있는지 잘 모른다. 내 인생에서 아빠의 존재감이 크지 않다는 것 - 심지어 ‘미미하다’시피 하다는 것은, 부모가 되고 보니 참 원망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내 남편이 우리 딸인 평화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을 지켜보고, 이 부녀가 미래에 어떤 관계를 형성해나갈지 상상해보는 일만으로도 일종의 결핍감이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다.
오늘 엄마가 서울에 놀러 와 조수석에 엄마를 태우고 한바탕 도시투어를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엄마는 거의 엉덩이만 붙이면 아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충격적이라고 할 법한 것들을 여기 기록해두고자 한다. 이 모든 과실이 사랑받은 유년시절의 기억이 없어서라고 이해하기까지 엄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억울해서라도 기록을 해두어야겠다.
아빠는 키가 아주 작다. 심지어 겨우 160cm인 나보다도 작다. 발도 작아서 나랑 발사이즈가 비슷하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엄마가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저렇게 작은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했다고 한다. 게다가 저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남자에게 니가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시집을 가느냐면서,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가 없었을테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습기는 하나, 나는 엄마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키가 작아서가 아니다. 그건 아빠가 결혼을 하자마자 돌변했고 그 이후로 다시는 결혼 전 연애시절처럼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본인은 대전에, 엄마는 서울에 있을 때 주말마다 올라가 엄마 학교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이틀마다 등기로 손편지도 보냈다. 아빠는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글솜씨도 좋다. 아빠는 엄마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달콤한 말로 맹세를 했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아빠의 글솜씨나 기타연주실력, 예술가적 면모를 높게 샀다고 한다. 그래서 주위 친구들의 ‘그 남자가 뭐가 좋냐’는 반문과 외할머니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엄마 아빠의 관계는 신혼여행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갑자기 툭툭대기 시작하더니 매사에 비아냥거리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조로 엄마를 대했다. (이래서 결혼 전에 같이 살아봐야 한다는 거다) 급기야는 신혼여행이 끝나고 아빠가 다시 출근하는 첫 날, 새벽같이 일어나 서투른 솜씨로 스물몇살 엄마가 차려놓은 샌드위치를 보고 아빠가 말한다. “이런 걸 밥이라고 내놨냐.”
아빠 직장에서 가족 단위로 야유회를 하는 날에는 엄마를 방에 혼자 두고 텐트에서 동료 여직원들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난 후 육아는 남의 일처럼 여겼고, 어린 내가 걷다가 다리가 아파 안아달라고 하면, ‘안기려고 일부러 그런다’면서 오히려 나를 혼냈다. 그러면서 남의 눈에는 좋은 남편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는지, 세살 배기 남의 아들을 목마 태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 정상에 올라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엊그제 아빠가 나한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기 하나 더 낳아.” “왜?” “아들 하나 낳아.” 딸인 언니나 나보다, 남의 집 아들이어도 아들이어서 그 친구를 목마 태워 등산까지 할 힘이 나셨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라는 과정에서나 결혼 과정에서나 아빠가 한 번도 남아선호사상이나 가부장적 마인드를 비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저 대화만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에 대해서 돌아보고 기록을 남기기로 생각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다.
나는 어릴 때 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일단 평일에는 아빠가 새벽 늦게 들어와서 술냄새를 풍기면서 귀찮게 했던 기억이 있고, 효자손을 매라고 들고 나를 쫓아다니면서 때리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직접 만든 교재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등의 ‘훈육’의 기억은 있지만, 아빠가 다정하게 나를 안아준다거나 사랑한다고 한다거나 어딜 데리고 다니면서 친절하게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설명해준다거나 하는 기억은 전혀 없다. 아빠는 내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럼 뭐하냐,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말했다. 엄마와 언니와 기억의 조각을 맞춰보면 이 모든 것은 내 기억의 왜곡은 아닌 것 같다.
슬프게도, 그리하여 나에게 아빠와 단둘이 만든 추억이 있느냐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관해 나는 별로 크게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잘 살아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는지, 실패했다고 여길 때, 슬플 때, 단지 외로울 때에도 얼마나 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는지를 느끼고 보니, 반대로 나에게 그런 큰 존재 하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아쉽다.
남의 눈을 의식해 집 밖과 안에서 두 얼굴을 하고 행동한 데다, 집 안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엄마의 놀라운 살림 실력도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아빠의 모든 처신은 가족구성원에게 되돌릴 수 없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행사할 수 있는 폭력도 있는 법이다.
엄마는 애정결핍이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아빠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고, 그 갈구는 너무나 오래 오래 마음 속에 고여 이젠 끈적끈적하게 굳었다. 그 오랜 감정은 미움, 자기방어, 합리화와 뒤섞여 공격적인 양상을 띄기도 한다. 이 결핍은 자식에게도 표현된다. 엄마가 아빠 외에 가장 친밀한 애정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자식 외에 어디 있겠는가. 그 결핍은, 본인의 존재감이 아직까지 유효함을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방식 - 결혼해 출가한 자식들의 살림살이에 관여하는 - 으로 표출된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모이고 서로를 웃으며 대하지만,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가 않는 커다란 구멍 하나씩을 갖고 모인다.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빠도 몰랐기에 우리도 그렇게 키운 것일까? 아빠 앞에 서면 우리는 비난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엄마 앞에서는 성적이나 합격 등 ‘결과’로 증명해보일 수 있는 것으로 칭찬 받지 않을 거면 자신 있게 서지 못했다. 남자애들에게 괴롭힘 당하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남자선생님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들어도 ‘네가 예민한 것’, ‘다 지나갈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아빠는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언제나 집에 돌아와 저녁만 먹고 잠에 들었고, 엄마 혼자서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했기에 우리는 엄마 한 명만의 생각을 주입받았다. 아빠 엄마는 분명 우리를 본인들 방식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예상하지 못하셨다. 결과가 아닌 노력 그 자체에 대한 인정과 칭찬이 없이 우리는 매일 사랑을 갈구하면서 자랐다. 아빠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 지혜롭게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 같은 건 다 커서 혼자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영화나 책이나 진짜 ‘어른들’에게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내 남편이 평화의 아빠인 데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자 하는지 평화에게 다 일러주고, 평화가 곤란에 처했을 때는 아빠 엄마도 모자란 사람이지만 함께 지혜를 모아보자고 격려해줄 사람이다. 평화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 않고 몸을 움직이는 희열을 알게 해줄 것이고, 화장품이든 자동차든 함께 갖고 놀면서 그 안의 성분이나 부속품을 파헤쳐보는 호기심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줄 사람이다. 요리, 청소, 설거지, 빨래는 엄마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하는 것임을 보여줄 것이고, 평화가 어떤 걸 좋아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럴 수 있다’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런 아빠와 20년을 산다면, 평화는 나와는 다르게 남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면서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에서 강요하는 인간상 특히 여성상이라든가 학교에서 주입하는 덕목들에도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면서, 그러나 사회에는 제 나름대로 기여할 방법을 찾으면서, 그리고 행복의 참된 의미를 명상하면서 커나가지는 않을까?
1년간의 육아휴직이 오늘부로 끝났다. 오늘은 어버이날이었지만, 내 생일이기도 했다. 내일부터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간다. 1년 동안 부모 역할을 하면서, 좋은 양육자가 되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절실하게 또 확실하게 깨달았다. 평화는 걷고, 말하고, 우리와 대화를 시작했다. 부모의 말이 자식에게 세상의 모든 것인 순간이 있다. 평화의 옆에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줄 수 없을 때에도, 평화가 항상 옆에 우리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복직과 함께 이루어낼 미션 중에 하나다. 그것은 승진보다도 조직 내에서의 그 어떤 성취보다도 중요하다. 행복은 직업적 성공에서 오는 경우보다, 가족 관계의 성공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