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영화 <디태치먼트>, 그리고 분리불안에 관하여
마라톤을 좋아하는 독서모임 멤버의 제안으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의 원고를 탈고한 시점인 2007년 8월까지 마라톤 완주를 스물 다섯 번인가 했다는 하루키는, 자신이 왜 달리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가볍게 툭툭 내려놓듯 늘어놓는다. '조금만 방심해도 살이 쪄서', '건강 상의 이유로', '나는 혼자 하는 운동이 좋더라' 는 등의 일상 대화 수준의 글에서 시작해서 소설쓰기와 달리기를 비유하고 마침내 인생과 달리기를 비유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내용은, 그의 말대로 달리기를 주제로 삼은 인생 회고록에 다름 아니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마라톤 같은 하드한 운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만삭 때 홈트레이닝에 맛을 들여 지금까지 매일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특히나 달리기, 나아가 신체단련을 삶에 있어 일종의 애티튜드로 정의하고 그것이 인생의 나머지 부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부분이 그러했다. 그런데 기억에 가장 오래도록 남는 부분은 정작 본문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문학가 임홍빈씨가 작품에 관해 해설해놓은 역자후기 속에 있었다.
역자는 이 작품이 하루키가 1995년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가스 독살 사건과 고베 대지진을 겪으면서 집필 태도를 이전의 디태치먼트(Detachment)에서 커미트먼트(Commitment)로 전환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를 쓰던 1980년대 후반에는 주로 세상과 격리되어(detached) 자폐적이고 감각적으로 자아를 탐닉하는 성향을 띄다가 점차 세상과 소통하고 타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참여적인 성향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본인이 직접 증언하며, 인터넷에서 대강 검색만 해 보아도 하루키의 문학을 다룰 때 많은 평론가들이 항상 가져다 쓰는 개념이다. 아마 나만 몰랐지 하루키의 팬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을 이야기.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관계 없음)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역자에 의하면, 달리기에 관한 이 수필 역시 commitment에서 발로한 글쓰기로, 인생 후배들에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알리고, 이렇게 부족한 나도 해냈으니 당신도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루키의 Commitment 개념은 '사회 참여'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난 글에서도 등장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카뮈 등 일부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소환한다. 부조리에 반항해야 한다, 인간이 처한 이 고통스러운 조건과 적극적으로 대결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자살해서는 안 된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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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결고리를 증명이나 하듯, 영화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카뮈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며, 서로에게 더 다가가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detached), 끝내는 공허함만을 맛보게 될 거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인용하고 있는 'detachment'의 쓰임새는 하루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듯 하다. 즉 하루키의 디태치먼트가 타인과 사회로부터 관심을 끊고 오로지 자기 내면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면(detached from the others=committed to myself), 카뮈의 이 문장에서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데 같은 동사를 썼기 때문이다(detached from myself=committed to the others). 영화의 우울한 분위기와 내용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문장이 제법 고독하고 절망적으로 읽힐지 모르지만, 사실 이 문장은 그럴수록 타인과 결속해야 자존감을 느낄 수 있다는 커미트먼트의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고, 따라서 효과적인 인용이다.
문장의 출처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제밀라의 바람Le vent à Djemila>라는 짧은 에세이의 한 구절이었다. (프랑스어 원문 : Et jamais je n’ai senti, si avant, à la fois mon détachement de moi-même et ma présence au monde.) 이 에세이는 알제리의 제밀라라는 마을의 풍경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짧은 글이다. 제밀라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카뮈는 그 유적들을 바라보면서 바람과 햇볕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연이 주는 감각과 오래 전 쇠망한 문명의 흔적을 바라보는 경험이 그에게 어떤 모멘텀을 주었고, 위의 문장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인용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이어진다.
이렇게 격렬한 햇볕과 바람은 마치 나에게서 삶이라는 것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정신은 펄럭거리고 투덜대면서도 거의 저항조차 하지 못핬다. 곧 세상의 4면으로 퍼진 나는 바람이 되었고, 또 바람 안에 있기도 했다. 그렇게 이 오래 된 도시를 둘러싼 창백한 산, 낡은 기둥과 아치, 뜨거운 판석을 가로질렀다. 그 때처럼 나 자신으로부터의 거리감과 이 세상 속 현존을 동시에 그렇게 깊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바람과 혼연일체가 된 카뮈는 자신이라는 속박을 떠나 아주 자유로워 보인다. 이러한 자유는 그에게 현존감이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그렇다면 영화 <디태치먼트>에도 이런 자유로움이 묘사되고 있을까.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문제아들이 모인 학교의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고, 때가 되면 떠나는 철새처럼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산다. 이런 삶의 패턴이 그가 삶에서 느끼는 고통의 결과인지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detached). 나쁘지 않은 시민이고 본분을 다 하는 교사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를 우리는 간간이 어지럽게 삽입되는 플래시백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죽어가는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헨리는 어머니와 관련된 뼈아픈 기억을 관객에게 내비치고 만다.
그가 감당해낼 수 있는 수준에서 베푸는 선의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이끌려 그의 삶에 들어오고, 그는 벽을 친다. 자신을 좋아하게 된 학생 메러디스가 갑작스럽게 다가오자 그는 그녀를 밀쳐내고, 길거리에서 만난 성노동자 에리카에게 거처를 내어주기는 하지만 곧 보호시설로 보내고 만다. 카뮈가 부조리에 저항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던 '자살'을 메러디스는 끝내 선택하고, 헨리는 그 날 허공을 응시하면서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메러디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은 사람이 아니고, 텅 비어 있다고("I am not a person. I am hollow"). 여기에 인용구의 의미가 있다. 메러디스가 자살한 후에야 그는 자기 자신에서 - 그러니까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상에 현존함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보호 시설에 있는 에리카를 찾아간다.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비극을 통해 디태치먼트에서 커미트먼트로 삶의 태도를 전환한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도입부의 인용문에 따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격리되어 있는 순간에 현존감을 느끼는 캐릭터를 완성한다.
디태치먼트와 커미트먼트는 대립되는 개념인 만큼,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말인즉슨 어떤 것에 관한 집착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 다른 것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친숙한 것들과 이별함은 곧 낯선 것을 만나고 심지어 창조해낼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예술가에 관한 설명 같지만, 사실 나는 나의 아기에게서 이러한 과정을 관찰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아기였으므로,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나의 딸 평화가 50일을 지내고 2개월 아기가 되어간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 노는 시간이 늘면서, 우리 부부와 아기 둘 모두에게 수월하고 건강한 양육 방법이 있을까 해서 육아 책을 세 권 샀다. 그 중 한 권은 엄격한 수면교육을 강조하고 있고, 다른 한 권은 융통성 없는 수면교육에 반대하고 있다. 어쨌거나 두 권 모두 한 번 시도해볼만은 하다고 쓰고 있어서 50일이 되는 날부터 슬슬 일명 '먹-놀-잠' 패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수면교육의 핵심이라는 게 아기를 내 몸에서 슬슬 떼어내는 거라서, 보이지 않는 탯줄을 한 번 더 끊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기에게 잠은 누군가의 품에서 혹은 젖을 빨면서 자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등을 대고 누워서 혼자 자는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 수면교육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교육을 완강히 거부하는 편은 아니어서, 시도할 때마다 절반 이상의 성공률을 보인다. 사실 처음부터 밤에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침대에서 깊게 오래 잘 줄 알았기 때문에 싹이 보였던 셈이다. 수면교육의 효과인지 요즘에는 전동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혼자서 1시간을 놀다가 졸리면 잠투정 한 번 하지 않고 혼자 스르르 잠에 들 때도 있다. 우리 부부 둘 중 한 명이 평화를 안고 식사하지 않아도 되는 횟수가 확실히 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분리불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분리불안은 만2세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물리적으로 아이를 부모에게서 '분리'하는 과정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디태치먼트에 대한 생각이 아기의 요즘 삶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간 것도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기에게도 친숙함과 이별하고 낯선 것을 만나는 과정이 매일같이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피아식별이 없는 평화에게도 친숙한 부모의 온기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외부의 자극은 다르게 느껴질테니 말이다. 어른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부모의 온기는 아직까지 아기에게 '자기'이며, 외부의 자극은 '타자'다. 혼자 전동바운서를 탈 때는 자기로부터 격리되어 타자와 교감하는 순간일 테고, 다시 울면서 품을 찾을 때는 타자로부터 멀어지고 다시 자기로 돌아오고자 하는 순간일 테다. 공갈젖꼭지에 탐닉할 때는, 자기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그 안에서 안정되려고 할 때겠지.
우리는 어른들도 분리불안을 겪는다는 걸 상식처럼 알고 지낸다. 친숙한 것에 주었던 에너지를 낯선 것으로 안착시키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사실 그리 흔치 않다. 공갈젖꼭지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큰 소리를 내면서 쭉쭉 빨고 있는 평화를 볼 때면, 거대한 자기애에 고통스러워 하던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키처럼, 헨리처럼, 자폐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타자로 눈을 돌릴 때에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 동안 보아왔던 많은 책과 영화가 그걸 가르치고 있었을텐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