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아메리카>와 <미스터 문>이 만났을 때

자리의 경계를 허물면, 더 큰 세상이 보일지니

by 딥마고

"여기는 여자 자리고, 저기가 남자 자리야."

4살 난 딸이 손을 휘휘 저어 동그라미를 두 개 그리면서 말했다.


우리는 추석을 맞아 사람이 거의 없는 넓은 잔디밭을 하나 차지하고 놀았다.

언니네 가족 다섯 명(언니, 형부, 쌍둥이 아들들, 여동생 하나), 우리 가족 세 명(나, 남편, 딸),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까지 해서 모두 모여 있었다.

내 남편은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남자 쌍둥이 둘과 공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었고, 나와 엄마, 언니, 형부, 그리고 딸의 사촌언니는 텐트를 치고 놀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성별에 따라 나뉘어 위치한다고 생각했는지, 딸은 '자리'라는 단어를 썼다.

나는 최근에 정주행을 마친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를 떠올리면서 딸에게 외쳤다.

"그런 게 어딨어. 너도 저기 가서 공 갖고 놀아."

작은 축구공 하나를 뻥 차서 드넓은 잔디밭으로 보냈다. 딸과 사촌언니는 강아지들처럼 공을 따라 뛰었다. 공놀이는 곧 혼성의 것이 되었다.


<미세스 아메리카> 캐스팅과 실제 인물들 : 필리스 슐래플리, 글로리아 스타이넘, 셜리 치점. 드라마는 대사와 에피소드를 촘촘하게 배치해 페미니즘의 복잡다단한 레이어를 드러낸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나에겐 완전히 예상 밖의 캐릭터와 내용을 주축으로 삼음으로서, 뇌리에 강렬하게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였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평생 일했으며, 가장 페미니스트적 삶을 살았던 반페미니스트 필리스 슐래플리.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이 모순은 이 인물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실재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또한, 이 드라마는 이 모순을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않고 대사 하나, 눈빛 하나로 넌지시 던진다는 점에서 아주 전략적이다.


필리스는 반페미니즘을 주도했던 인물답게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를 고수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여성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안' '주방'으로 인식하는 그 '여성의 자리'.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으레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자리'로 배정하는 그 '여성의 자리'.

정작 그 전통적인 가정을 지키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하느라 필리스 본인은 지킬 수 없었던 그 '여성의 자리'.

아이러니하게도, 필리스 본인이 비워두었기 때문에 가사일은 가정부, 육아는 올케 등 다른 여성이 대신 채워야 했던 그 '자리'.

그리고,

내가 축구공을 뻥 차서 더 넓은 곳으로 보내버렸던, 앞서 딸이 잔디밭에서 언급한 그 '자리' 말이다.




어제 딸과 함께 네일숍에 갔다. 손톱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칠하는 데 관심이 생긴 딸에게 평소 나에게도 큰 만족을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고 싶었다.

딸은 원하는 색깔을 고르기 시작했다. "분홍색이랑..."

1순위는 십중팔구 분홍색이다. 딸은 엄마 아빠의 눈을 벗어난 곳에서 성별에 관해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 어린이집 친구에게서, 사촌언니에게서, 유튜브에서. 남편과 나의 역할은 편견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초록색, 파란색, 하늘색, 주황색, 빨간색!"

뭐랄까,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큰 안도를 한다.

우리의 중화가 성공하여, 딸이 세상의 다양한 걸 모두 무시하고 하나만 바라보는 편협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는 게 증명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딸의 차례가 끝나고 내 차례가 왔다. 딸은 혼자 놀기 위해서 가방에서 장난감을 꺼냈다. 잔디밭 위에서 조카딸과 함께 한참을 갖고 놀던 '요괴 메카드'다.

조카딸이 대부분의 요괴 메카드를 갖고 있는 걸 보고, 나는 딸에게 차근차근 모아 그만큼을 사주기로 약속하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 준 요괴는 '미스터 문'.

딸은 공처럼 동그랗게 말렸다가 던지면 촥 하고 펴지면서 토끼 모양으로 변신하는 '미스터 문'과, 공으로 변신하지 않는 로봇 '타나토스'의 피규어, 그리고 이들이 타고 다니는 노란 자동차를 갖고 있다.


떡방아를 쥐고 있는 걸 보니 한국 토끼이고, 아마 달에 살고 있어서 이름이 미스터 문인 것 같다.
타나토스.

네일숍에 함께 있던 옆 손님이 '메카드'라는 단어에 반응한다.

"메카드요? 메카드는 아직도 있네. 우리 아들들 어릴 때도 맨날 메카드 갖고 놀았었는데. 동네 남자애들 맨날 모여서 저거 하는 거 보는데 무슨 도박판 같더라니까."

네일숍 사장님은 딸만 둘이다.

"어머. 나는 아예 몰라 저런 거. 따님은 신기하게 여자앤데 저런 것도 좋아하나 봐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몇 초동안 내 머릿속에는 메카드 놀이를 전파해준 아이도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스쳤다.

정색을 할까 하다가, 맞추기로 한다.

"얘는 워낙에 그런 거 상관없이 본인이 재밌으면 다 좋아해요."


'여성의 자리'라는 건 누가 정해두는 것일까?

필리스의 머릿속에 그어져 있는 그 테두리선 안에서 네일숍은 '여성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공간일 테다.

스스로를 꾸며 치장하는 건 여성의 몫이라는 관념이 그 '전통' 안에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전통'적인 공간에서 입으로 '슈욱' '슈욱' 소리를 내면서 로봇 놀이를 하는 내 딸을 필리스가 봤다면 어땠을까?

혀를 끌끌 차면서,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아이라고 흉을 보았을까?


내 딸은 어릴 때부터 공룡을 아주 좋아했고 아직까지도 그 어려운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로 좋아한다.

타요에 나오는 모든 자동차들도 갖고 있고, 매일 매일 그 자동차들과 기차를 갖고 논다.

그래서 공룡과 자동차가 그려진 옷이나 공룡 장난감, 자동차 장난감을 당연히 좋아한다. 나는 아이를 위해 그런 걸 살 때마다 늘 의아했다.

왜 그런 옷이나 장난감은 'boys' '남아용'이라는 이름에 갇히는 걸까?


나는 내 딸이 네일숍에 갈 만큼 '예쁜 것'들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성별의 편견에 갇히지 않고 로봇이든 공룡이든 받아들이는 것이 반갑다.

그게 딸이 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손톱을 알록달록하게 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화장술, 색채학, 미술, 공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로봇에 대한 관심이 공학으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물리학으로, 공룡에 대한 관심이 고고학이나 수의학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까?


최근 읽고 있는 <모든 것이 되는 법>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과학계에서의 노벨상 수상은 외고집의 천재이기보다 다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전형적인 과학자와 비교하여 연기자나 댄서 혹은 마술사로 활동하는 경향이 22배 높고, 시를 쓸 확률은 12배 높으며 미술 활동을 하는 경우도 7배 높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음악을 작곡하는 경향도 2배 높다.

이 책의 저자는 뮤지션이자 웹디자이너고 영화감독이면서 변호사다. 어느 한 가지 분야를 평생에 걸쳐 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의구심 어린 시선에 고민이 컸으나, 자신처럼 한 가지 분야에만 집중하지 않고 여러 분야를 오가며 왕성한 호기심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다능인'이라 칭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라고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왕성한 호기심을 어떻게 제어하는지, 어떻게 길들여서 내 삶의 동력으로 만들 수 있는지 가이드를 제공한다.


위에 내가 인용한 구절은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천재의 사례 뒤에 따라붙은 문단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던, 모두가 아는 천재. 사고의 경계를 허물어 특정 사고방식을 완전히 다른 분야에 적용해보는 것이 창의성의 근간임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를 붙여보는 데서 우리는 화학작용을 목격하게 된다. 미래에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통합적 사고는 점점 중요해지고, 일과 일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목사는 유튜브 운영을 위해 영상편집을 배운다. 약사는 그림을 그려서 건강에 대해 설명하고, 그걸 출판한다. N잡의 시대이기도 하다. 프리랜서의 비율은 점점 올라가기만 한다. 10-20대에 학습하고, 30-60대에 노동하며, 그 이후에 은퇴하는 삶은 저물고 있다고 석학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의 자리'를 정해둔다면, 이건 굳이 페미니즘의 이슈는 차치하고라도 미래에 대응하는 차원에서도 역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아이가 있는 유부녀'의 자리는 좁다. 아주 단단한 돌벽이, 나를 포함한 이 여성들의 자리 주위를 둘러쳐 있다.


지난주 열 번째 타투를 받으러 타투 스튜디오에 갔을 때다.

어찌하다 내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타투이스트가 어려 보인다는 칭찬을 한참 늘어놓고는

"그렇죠. 그게 사는 거죠! 인생 이렇게 살아야죠. 나도 언니처럼 그렇게 살 거야."


나는 웃었고, 물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 칭찬에는 어떤 생각이 숨어 있는 걸까?

보통의 '엄마'들은 이렇게 타투받으면서 못 살고, 안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당신이 멋져 보인다.


엄마가 되고 나서 이렇게 칭찬을 받으면서도 슬플 때가 종종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보통 통념상 '엄마'의 자리가 아닌 곳에 내가 위치해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타투. 진한 화장.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옷. 나의 전문분야. 나의 애정해 마지않는 취미. 커뮤니티.


내가 나일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내가 여성이며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한 순간에 삭제된다고 생각하는 게 내 입장에서는 더 어색하다.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미디어에서는 온통 엄마가 된 후 억제되는 자유, 달라져 버린 외모와 삶의 방식만을 강조하니까.

이런 강조들이 '여성의 자리'를 제한된 데에만 묶어두려고 하는 남성 기득권의 권력행사라고 말한다면, 너무 음모론자처럼 보일까?


결혼을 한다고, 아이를 낳는다고, 삶이 끝나는 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삶은 더 풍성해지며, 내가 나일 수 있는 요소들은 더 다채로워지고 서로 교류하며 성장한다. '여성의 자리'는 사회가 정하는 게 아니다. '여성의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남성의 자리'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오로지 개개인의, 유연한, 때에 따라 변하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 뿐이다.


나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남편은 이 상품의 네이밍을 보고 분노했다.



딸은 '미스터 문'이 토끼이고 핑크색과 보라색이 섞여 있다는 이유에서인지, "얘는 여자야 여자!"라고 주장했다.

나는 '미스터'라는 단어가 남성을 지칭한다는 걸 알려주며, '미스터 문'의 목소리를 따라했다. 동굴을 울리는 저음으로. 토끼와 핑크색이 여성이라는 젠더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 셈이다.


이렇게 축구공을 뻥, 찼다.

딸이 언급한 '여자 자리'와 '남자 자리'는 그 공 하나로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 날 딸은 공을 차고 공을 쫓아다니면서 잔디밭에 얼마나 다양한 식물이 있는지를 손으로 만지고 코를 대어 냄새를 맡았다. 아마 그렇게 세상을 한 뼘 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리를 정해두지 않는 것은, 이렇게도 성장에 도움이 된다. 딸에게도, 어른인 나에게도.


덧. 딸의 손톱에는 핑크색과 파란색이 초록색과 주황색, 하늘색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알록달록 칠해져 있다. 모두 다 그 자체로 예쁘고 멋진 색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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