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에 눈물 흘리는 여자

삶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by 딥마고

# 1


나의 딸 평화는 조금 있으면 100일을 맞는다. 다른 아기들처럼 10시간씩 통잠을 자지는 않지만, 아주 규칙적인 생활/수면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밤 9시-10시 사이에 잠이 들면 6-7시간 통잠을 자고 새벽 3-5시 사이에 깬다. 나와 아기 둘 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꿈수유'를 한 차례하고 잠이 들면 7-8시 사이에 어김없이 큰 소리로 울면서 깬다. 알람시계가 없이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9-10시 사이에 아기가 다시 잠들면 그 틈을 타 아침잠을 보충하는, 나이롱 아침형 인간(전직 올빼미).


밤에도 2-3시간마다 깨어 수유를 해야 했던 신생아 때와 달리, 단 한 번밖에 없는 새벽 수유는 매일이 특별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된다. 그러기를 한 달여,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잠이 덜 깬 정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할 때쯤에 찾아오는 예민한 감각은 심지어 반가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임신 호르몬인 릴렉신이 분비되고 있다는 증거인 나의 손가락 관절.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 빡빡한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수유 쿠션을 집어들 때 미세하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신경질. 계절에 관계 없이 차갑게 식는 새벽녘 가죽 소파의 감촉. 잠든 사이 모유로 더부룩하게 차올랐다가, 아기의 입을 통해 위장으로 모유가 전달됨에 따라 점차 부드러워지는 두 가슴.


아기가 다 먹었다는 표시로 입을 떼면 트림/소화를 돕기 위해 왼쪽 어깨춤에 아기를 올려둔다. 왼쪽 팔꿈치 안쪽으로 아기 엉덩이를 받치면,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타자를 쳐서 글을 쓸 수 있다. 그림 일기처럼 사진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간단하게 글을 쓰는데, 새벽의 침묵을 깨고 아기의 위장이 모유를 소화시키는 소리가 들린다. 꼬로로록. 가끔은 공기가 위쪽으로 이동해, 이미 잠의 세계에 빠져든 아기의 입을 통해 옅은 트림의 형태로 빠져나가는 소리도 들린다.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아까부터 아기의 코로 공기가 들락날락하는 소리도 규칙적으로 배경에 깔려 있다. 아기의 몸에서 어떤 일이 생기든, 아기는 숨 쉬느라 들썩이는 배를 제외하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의 왼쪽 얼굴과 귀는 빈 틈 없이 아기의 왼쪽 얼굴이 전해 오는 체온을 맞이한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이토록 오래 안고 있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온전히, 아무런 어색함도 없이, 서로에게 의지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이 느낌을 기억해야 해.


글을 쓰는 내가 생각한다. 메멘토 주인공처럼. 그리고 일기에 이렇게 쓴다.

영원히 기억할게.

새벽이라서 쓸 수 있는 문장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냥 그렇게 쓴다. 해가 떠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이 글은 어차피 나밖에 안 봐. 스스로에게 보였을 때 오그라드는 모습이라는 것은 나에게 없다. 그래서 그렇게 쓴다.


이 느낌을 영원히 잊지 않을거야.


# 2


우리의 기억은 기록이 지배하지. 그러니까, 기록이 잘못되었다면 기억 역시 왜곡될 수 있어. 기록이 옳게 되어 있더라도, 기억은 왜곡될 수 있어. 기억은 경험하는 시공간에 정체성과 감정과 관점이 덧입혀진 아주 개인적인 것이므로, 라쇼몽 같은 영화는 충분히 설득적인 구성으로 볼 수 있지.


기억이 정말 시공간과 정체성과 감정과 관점이 섞인 그 어떤 것이라면, 기억은 우리지. SF 영화처럼 우리의 기억이 육체를 떠나 다른 곳에 이식되지 않는 이상, 기억은 한 사람을 정의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객관적이지도 않고 쉽게 변해버리는 연약한 기억이나마 붙잡기 위해 우리가 매일 매일 기록에 이렇게나 매달리는 이유가 그래서 아닐까? 초 단위로 인생을 무한정으로 기록할 수 있는 시대라서 에버노트에, 메모장에, 인스타그램에, 페이스북에, 크롬 탭에, 브런치에 삶을 기록해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꾸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거야. 인간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대의 시대니까 더더욱.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무엇에든 도전해보라고 부추기는 시대니까 더더욱.


방향성을 잃은 것 자체가 하나의 방향이 되어버린 시대이므로, 더더욱.
우리는 우리에게 제약을 주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로 스스로를 깎아내야 한다.


아기를 낳은지 100일도 되지 않았는데 임신했던 느낌은 기억나지 않아. 호흡이 곤란했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 계단을 오르는 운동을 하면 아기가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이 났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과 그 느낌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르잖아.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임신했을 때 써 둔 일기를 바탕으로 기억을 복원하겠지. '요즘 숨 쉬기가 힘들다. 자궁이 커져서 다른 장기들을 누르고 있다.' 그래, 그랬었나보다, 하고.


당장 몇 달 전에 그렇게 극적인 신체적 변화를 겪고도 느낌을 기억 못하는데, 새벽 5시 비몽사몽 중에 6kg 나가는 아기를 안고 있었던 느낌을 기억할리가 있겠어? 그럴수록 쓰는거야. 영원히 잊지 않을게.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면 낯선 곳에서 딸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누군가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고, 내 앞에서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을지 몰라. 나는 기억나지 않는 타투를 한 채로 새벽 5시에 아기를 안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 3


그러므로 여전히 긍정한다, 나는 나의 기록을. 오늘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역시 수많은 개인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나의 기록이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수많은 알파걸들이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비슷비슷한 글을 쏟아내고 있는 요즘에 굳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글쓰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같은 이야기라도 내가 겪었기 때문에 글이 고유성을 얻게 된다고 보태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기억과 기록은 같은 현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걸 잊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은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일지 몰라. 유진이가 말했다.


다 알면서 어떻게 인생을 붙잡을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새가 다 달라서,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는 거야. 나는 오늘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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