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관하여

by 딥마고

어제 온종일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썩어 없어질 살과 뼈에 대해서, 매 순간 나를 지나쳐 끝내는 없어져 버릴, 수많은 생각과 작고 큰 결정들에 대해서. 죽음은 지천에 널려 있다. 구체적인 모양새까지 기억하고 있는 육체가 지난 해 말 사라지고 나자 나는 몇 번이나 가루가 되었을, 혹은 흙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물질로서의 몸뚱이들에 관해 구체적인 심상을 떠올렸다. 이 순간에 마지막 숨을 내쉬는 사람. 땅 아래 있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남겨지는 사람들. 나에 관해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마저 모두 사라진 먼 미래. 어젯밤 꿈에는 결국 망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죽음이란 사라짐이 아닌 차원이동일 뿐이라고 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토록 사라짐을 두려워하게 만든 것인가.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면 그것 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을텐데.


스물 두 살때쯤이었나 선릉역 근처 오피스텔에 누워 몇 달을 죽음에 관해 생각한 이후로 이렇게 끈질기게 죽음의 이미지가 나를 지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그 때와 지금 내가 떠올리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때 떠올렸던 죽음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 없어짐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없음'이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이 존재를 끝낸다는 것은 두려웠고, 그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무의미를 홀로 견뎌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귀찮음 같은 게 항상 나를 괴롭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20년을 내 인생이 합목적적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자랐던 순진한 아이의 당황감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자 나는 갑자기 성인이 되었고 과도기도 없이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 혹은 채워야만 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던 내 몸과 시간이 갑자기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생산적이지 않아도 되었고, 어떤 것을 달성하기 위해 뿌려지는 씨앗이라거나 레이스 위에 딛는 한 걸음이 아니어도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삶은 그런 거였다.


처음부터, 삶을 채우는 나의 모든 행동에는 인생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단련 역시 단련 그 자체에 의의를 둘 때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수단으로 삼은 지식은 결국 다 날아갔다. 물론 과정에서는 즐거움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즐거움은 지식 습득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목표점을 정해두고 포도알을 채워나가는 성취의 즐거움이었다. 20대의 행복을 위해 10대의 행복은 유예되었고, 10대의 나는 그렇게 인생은 원래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10대의 싱그러움과 엉뚱함을 오롯이 바쳐 일궈낸 나의 20대는 그래서 행복했는가.


생산적이지 않아도 되는 20대의 삶은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지독히도 무의미했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고등학교 중간고사처럼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방대함은 곧 공허와도 같았다. 도서관에는 읽고 싶은 책이 널려 있었지만, 이 책을 읽어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당장에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짜릿함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만점에 가까운 점수, 사람들의 칭찬, 남들이 좋다는 대학 같은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목적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내가 더 이상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다. 단지 중학교 때부터 남들과는 다르고 싶어 듣기 시작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만은 계속 들었다. 리스너라는 직업이 있고 자격증 시험이 있었다면 아마 그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꼭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직까지, 모두가 목표를 정하고 노력해서 일단 무엇이 된 후에 그 무엇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하라고 한다. 변호사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변호사가 일단 되어본다. 방송국 PD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면서 방송국 PD가 된다.


온 우주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느낌으로 방구석에 누워있다보면 누구에게도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은 없고 무언가를 하면 그저 잠깐 나라는 사람이 정의될 수 있으니까 결국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의미가 있는 건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몰랐다. 점차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하고 또 그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험준비 외에 내가 잘하는 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춤을 잘 추는데 내가. 춤을 춰 보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니 의미가 없었다. 글을 좀 써볼까.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보니 나 같은 애는 글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그렇게, 무의미를 견뎠다.


직업을 갖고 - 즉 무언가가 되어 그 역할을 질리도록 수행하고, 무에서 한 사람의 존재를 탄생시키기까지 한 30대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니, 당장 내일 내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매 순간을 대하게 된다. 내 앞에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고 권태로움을 귀찮아하던 20대와는 다르게, 당장 내일 내가 길 가다 어떻게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삶을 다루자는 태도다. 비단 내가 그때보다 늙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죽음에 대한 경험이 쌓인 결과다.


이제야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는 게 확연해진다. 원래 목적이 없으니 모든 행동이 생산적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했는지 강박적으로 따지지 않고, 찰나의 감각과 사소한 결정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 좋아하는 색깔 배치에서 오는 시각적 쾌, 원두를 고를 때의 고민, 발걸음이 가벼운 날의 기분,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자체, 평화로운 어떤 오후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독서.


아기의 태명을 평화로 지을 때, 이런 모든 생각을 계산에 넣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평화가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 평화를 평화라고 부르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평화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무목적성, 있는 그대로 가만히 놓아둠, 강인함, 활발함, 따뜻함 같은 것이 내 주위에 에너지가 되어 감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화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내가 이 맘때쯤 품었던 죽음에 관한 생각을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하겠다.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이 죽음은 곧 삶을 의미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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