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여성일 수 있는 사회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되돌아보면, PD로 일하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듣게 되는 말들이 참 많다. 나의 경우 십중팔구는 외양, 주로 옷차림에 관한 말들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입사하기도 전인 인턴 시절, 한창 기획 단계에 있었던 프로그램에 배치된 적이 있다. 아직 제작에 들어가지 않았었기 때문에 매일 일정이 회의의 연속이었다. 오전 10시쯤 출근해서 각자 자료조사와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메인 선배가 회의하자고 하면 2~3시간 정도 기획 회의를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보냈었나, 한 여자 선배가 출근하자마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너는 조연출이라는 애가 왜 치마를 입고 다니냐?
방송 제작시 스탭들은 카메라에 걸릴 경우를 대비해서 시커멓게, 또 언제고 먼지 많은 바닥에 앉거나 뛰어다닐 수 있도록 아주 활동적인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이렇게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면 선배가 내 치마를 지적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 때 하는 일이라고는 회의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집에 가는 것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때 내가 입고 있던 치마는 아주 신축성이 좋은 롱스커트로, 막 집에서 뒹굴다가 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편안한 핏이었다. 거기에 전력질주를 해도 좋을 만한 뉴발란스 530을 신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밤샘 촬영을 한다고 해도 괜찮을 법한 착장이다. 색깔도 어두웠는걸.
나의 의상을 지적한 그 선배는 심지어 나보다 2살이 어렸다. 소위 '빡세다'는 바닥들 - 영화판, 연극판, 방송판, 의료판(?), 법조판(?) 등 - 에서는 나이 그런 거 없다. 성별과 연령대 관계 없이 모두가 군인을 흉내낸다. '짬밥 순'이라는 거다. 방송 바닥도 칼 같다. 한 달이라도 먼저 일을 시작했으면 철저하게 선배. 후배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너'라고 반말해도 된다. 물론 OO씨, 언니, 형으로 불러주는 선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인턴 시절이던 그 때는 기분 나쁠 권리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나의 일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 나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대부분의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이힐, 립스틱, 페미닌한 분위기의 그 어떤 것. 지금은 남편이 된 연애대상까지.
연출 딱지를 달고 나서는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조연출 기간 내내 나는 내가 나 자신을 꾸미는 방식 - 나아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조언(을 빙자한 비난)을 상당히 많이 들었다. "너 오늘 화장이 좀 진하다?" "오늘 결혼식 가냐?" "남자친구? 아마 곧 헤어지게 될 거야." 아하, 조연출은 노예의 다른 말이어서, 아직은 일을 배워야 한다는 명목 하에 인격과 개성은 말살해도 되는 존재로군, 하고 체념했을 정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내가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방식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과 내가 행동하는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쳐왔다. 말하자면 나는 화장을 지우면 다른 사람이 된다. 수능이 끝난 그 날부터 시작된 스모키 화장은 아기를 낳은 지금까지도 나의 인격이라 할 만큼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니 밤을 새는 촬영날이기로서니, 이틀 밤을 새야 하는 편집 스케줄이 있기로서니, 나에게 다른 차림을 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겨울철 계속되던 철야회의에 자주 입었던 캐주얼한 faux fur 재킷은 '화려하다'며 선배들의 뒷이야기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반면 몸이 안 좋은 어떤 주말에 안경을 쓰고 최소한의 화장만 하고 출근했을 때 어느 남자 선배는 '눈 버리겠다'며 다음부터 화장 꼭 하고 오라고 했다. 아니,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화장을 해서도 안 되고, 안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내가 많은 선배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 방식을 바꾸지 않은 이유다. 나는 그냥 나여야만 했다. 뛰어다녀야 하는 촬영일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입고 싶은대로 입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자, 사람들은 '쟤는 원래 저렇겠거니'하고 캐릭터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이렇게 내가 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나서 옷차림이나 화장과는 별도로 순전히 퍼포먼스만으로 인정을 받는 일이 더러 있고 난 후에도, 현장에서 여성이라서 겪는 부당한 일들은 계속되었다. 관계자들은 구태여 소개하지 않으면 키가 작고 어려 보이는 나보다 덩치가 크고 '진지해 보이는' 남자 후배를 당연히 내 선임으로 알았다. 일처리에 있어서 다른 PD들과 마찬가지로 철두철미하게 굴어도, 여자 PD라서 '기가 세다', '무섭다'는 평가를 들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자 PD들은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남성의 룰을 따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까라면 까고, 싫어도 술자리에 가서 '네트워크'를 다진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민낯에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여자 PD에 대한 고정관념은 보통 야상점퍼에 보이시한 헤어컷(<그사세>에서 송혜교가 아주 예쁘게 각색한 스타일)으로 대표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에서 쓰듯, 그것이 이 바닥에서는 '진지하게' 여겨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여성이므로 내 가치를 증명해보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너무 여성스럽게 입는다면 진지한 인상을 못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반들거리는 립글로스를 바르고 여성스러운 치마를 입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 이 문제에서 슬픈 진실은, 외모에 관한 한 우리는 남자를 기준으로, 표준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p.42
딸에게 젖을 먹이면서 '유리천장 뚫은 여성 임원들이 여성 직장인에게 전하는 조언 4'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여성 임원들은 직장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남성의 방식을 따르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골프든 산악회든 남자 부장들은 기본으로 2~3개, 남성 임원들은 5~6개씩 모임이 있는데 여성들은 그게 없다는 거다.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주가 넓다." (...) "승진 기회나 주요 역할을 양보하라든지 불필요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단순히 수긍만 하지 말고 자신의 성장을 위한 협상 기회로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 남자들은 양보할 때,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갖기 위한 협상을 한다." (출처: 유리천장 뚫은 여성 임원들이 여성 직장인에게 전하는 조언 4 http://m.huffpost.com/kr/entry/15482580#cb)
조금 슬프지만, 이것이 현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의 역할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이기만 하면 노력하지 않아도 획득할 수 있는 '나는 커리어에 대단히 진지하다'는 인상을 얻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것일까. 골프를, 산악회를 따라잡을 만한 네트워킹을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많은 주말을 바쳐야 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남성을 관찰하고, 사회에서 장점으로 여겨지는 면들을 따라하려 노력했을까.
나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옷을 살 때, 기저귀를 살 때, 심지어 공갈 젖꼭지를 살 때에도 핑크/블루로 강요당하는 성별에 대해 생각했다.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딸이 독자적으로 내린 선택이 그 누구에게도 부정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중에 딸이 커서 나에게 여성으로서의 사회생활에 관해서 묻는다면, 다수인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명예남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 사실은 '다수인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따위의 과제가 딸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