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작업에서 오는 불안감 삭제하기
채우는 것만 배웠지, 비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거든
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끊임없이 채우게 하는 마케팅을 업으로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광고/마케팅 업에 종사하는 나는 대중들에게 특정 브랜드의 상품을 마케팅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물건을 끊임없이 사라고 이야기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요즘같이 촘촘하게 머신러닝으로 관심사 타겟팅, 큐레이션으로 맞춤형 콘텐츠를 추천받는 환경에서는, 어느 정도 사람들이 기존에 했던 행동을 기반으로 관심사에 가까운 상품을 소개받는 것도 맞지만 관심사에 맞는 것들만 추천받으면서 소중한 관심사가 특정 상품에 고립될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소비자들의 각자의 성향에 맞는 관심 행동을 어느 정도 보일 수 있지만, 광고 또는 큐레이션 서비스가 역으로 우리의 관심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건을 더 사게 되고, 구매를 더 하게 되고, 새롭게 추천받은 콘텐츠나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그것을 원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진짜 원해서 그것에 노출되었는지, 노출되다 보니 필요하다고 느낀 것인지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다.
넷플릭스에서 <미니멀리즘 - 오늘도 비우는 사람들>을 인상 깊게 보면서 물건과 심리적인 연관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다큐멘터리에는 천천히 버리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행복할 수 있게 물건을 다운사이즈 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본주의의 기반은 성장에 있고, 기업은 계속 성장하며 이윤을 내야 한다. 다만, 선택의 자유가 없어지고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 중요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큰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그들이 만든 플랫폼 범주 안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물건이 없는 상황은 완벽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며,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이 물건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지만, 그럴 자유를 점점 뺏기고 더 많은 브랜드를 소비하면서 물질을 숭배하게 된다. 그럼에도 완벽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무조건 버리는 것이 핵심이 아닌, 필요한 것만 남기기.
영상을 보고 주변을 살펴보면서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버릴 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장을 보면 몇 년간 안 입는데도 가지고 있는 옷은 왜 이렇게 많으며, 조금 쓰다가 다른 제품으로 갈아탄 크림, 로션은 왜 이렇게 많은지, 몇 년간 표지도 안 넘기는데 가지고 있는 책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필요한 것은 내 눈앞에 모두 보이게 배치해둔다는 생각으로 물건 정리하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 물건이 진짜 필요한 것인지 판단해볼 기회조차 없이 물건들은 방 안에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방 안을 둘러보고 특정 상품을 정리하는 것은 꽤나 자신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장 많이 정리한 것은 책이다. 20년간 살아온 집이다 보니, 내 성장과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지만 제때 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 수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분명히 안 읽는 책들이, 앞으로도 전혀 안 들여다볼 것 같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수많은 책들을 내게 필요한 것, 안 필요한 것으로 분류하는 작업 자체가 내게 필요한 책을 걸러내는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생각보다 분류 작업이 꽤나 오래 걸렸고 이렇게나 안 보는 책들이 많았다니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책장에 박혀 있는 것보다 그 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닿으면 너무나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는데, 나의 책장에 쌓여있기엔 참 아깝다.
중고 플랫폼에서 책을 팔기 시작했는데, 온라인으로 책방을 운영하는 느낌이라 참 재밌었다. 책방지기가 되어보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었지, 이 책은 내가 직접 소장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이런 생각들이 모두 나를 거쳐간 책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내 주관과 취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줬다.
무엇보다도 내가 선택하며 좋아하는 것들만 남긴 책장은 또 다른 만족감을 줬다. 독립서점에서 책방지기가 자신이 읽어보고 애정 하는 책들만 남겨둔 것을 보며 책방지기의 취향을 파악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책장을 갖는 게 정말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마음이 유난히 흔들리는 날이 있을 때, 내가 감명 깊게 읽고 위로를 받았던 책이 채워져 있는 책장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충만한 사람일까? 위로받을 순간에 내가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지, 어떤 글귀로 자신을 채울 수 있을지 아는 사람 같아 정말로 멋있다.
영국 런던에는 베스트셀러를 소개하는 책장에 해당 책에 대한 책방지기에 대한 생각이 적혀 있는 'London Review of Books'라는 서점이 있고, 국내에서는 광교에 오상진, 김소영 부부가 책에 대한 리뷰를 가득 적어둔 '책 발전소'라는 서점도 있다. 사람의 북리뷰를 살펴보다 보면 그냥 지나갈 책들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며 특별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책의 리뷰를 함께 적어둔 책들이 중고책으로 판매가 많이 되기도 했다. 미니멀리즘으로 정말 필요한 책들만 남기면서 애정 하는 책들만 추천하는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화장품도 정리했다. 잘 안 쓰는 립 제품 들은 과감히 버렸다. 위생적으로도 안 좋기도 하고, 앞으로 쓸 일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선물 받아서 진심에 더 잘 보답해 쓰고 싶은 특정 상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화장품은 정리했다. 휴대폰의 앱들도 정리했다. 쌓아둔 사진들도 정리했다. 책상 위 물건도 정리했다. 다시 쌓여가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들 위주로 남기려고, 계속해서 정리하는 중이다. 지금은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중, 다시 쌓여가면 또다시 미니멀리즘으로 갈 예정.
꼭 버리지 않더라도, 그 상품이 나한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엇이 내게 필요한 건지 생각하면서 정리하는 것은, 내가 자율적으로 내 취향이 담긴 물건들을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냥 추천해주는 상품들이 아닌, 내 취향에 맞는 상품을 자의적 판단으로 고르게 된다는 의미기도 하겠다. 무엇보다도 내 취향이 듬뿍! 담긴 책장이라던지,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멋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