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완은 귀국한 다음날 늦은 저녁
찻잔을 앞에 두고 아내에게 지난 여러 날의 여정을
거짓 없이 조곤조곤 실토했다
어쩐 일인지 떨리거나 죄의식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아내도 역시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모든 상황을 들었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이틀 후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이혼 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조정기간 중이다
절차가 마무리되면 헤어지는 일만 남는다
아내도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었으니 절차상에 큰 무리는 없을 성싶었다
재산상에 다툼도 없다
옛날부터 우리는 독립채산제 형태의 자급자족 살림이었으니까
아내의 재산은 나보다 10 배정도 될 테니 내가 넘보지 않으니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가을이 익어가는 늦은 저녁 한통의 전화받았다
뉴욕에서 온 보이스톡 국제전화였는데
'수연'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수연'이라면 173쪽 메모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이 아닌가
이야기 인즉슨 이러했다
이번 휴가에는 꼭 한국에 들러 선생님 찾아뵈었으면 해서 전화를 드렸다는 것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나고야에 살던 '아츠코'의 딸라고 했다
나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학부시절
방학 때 나고야 집을 들리면 엄마가 존경하는 작가님이라고 그림 자료랑 시집을 보여주며 입이 달토록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어젯밤 자지 꿈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했다
갑자기 꿈에 나타났다는 것은 또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 일까 궁금했다
......
수연의 엄마 '아츠코'는 이태전 여름에 빗길 자동차 전복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저녁 퇴근길에 나고야 외곽 고속도로 빗길에서 차량이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뚫어나가 난간아래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전복된 혼다 SUV 차량은 여러 차례 뒹굴러서 완파됐고 고속도로 순찰대와 구급 엠블런스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엄마의 숨은 멎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전복된 차량의 속도 게이지가 140Km에 멈춰 있었다고 했다
사고 초기 수사에서 경찰은 자살 쪽에 무게를 두는 듯했지만
과속 외에는 정황상 자살을 뒷받침 할만한 근거가 추가로 나오질 않아서
결국 사고사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측근들의 말로는 집으로 가는 방향과는 조금 다른 곳인데
왜 그 시각 빗 길에 그 고속도로를 타셨는지 알 수가 없다고들 했어요
그런데 어젯밤 꿈속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제게 현몽처럼 나타나
선생님을 꼭 찾아뵈라고 하셨어요
꿈이 너무 현실 같아서 아직도 너무 생생하고 혼란스러워요
선생님을 찾는 일은 의외로 수월했어요
Daum에서 선생님을 검색하니까 블로그랑, 전화번호랑, 주소, 메일 등 여러 가지 신상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고요
어느 해 방학 때 엄마를 보러 집에 갔는데 벽에 걸린 선생님 그림이랑 시집을 보여 주셨어요
샘의 두 번째 시집을 건네며 읽으라고 주셔서 지금도 제가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샘은 우리 엄마와 어떤 사이 셨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제 한 달이 채 안됐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ᆢ
아츠코라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쌍둥이?
순간 벼락이 지나가듯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뜨거운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수연 씨 혹시 쪽지나 메모 같은 것을 도서관 열람실 서책 갈피에 넣어두신 적이 있나요"
"네에?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ᆢ"
"제 집에서는 전공서적을 읽으며 간혹 제 책에 메모를 해두기는 하는데 그런 걸 말하시는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겠어요 제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잠깐 했네요"
"그리고 거리상으로 뉴욕에서 서울은 너무 먼 거리네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ᆢ"
"아뇨ᆢ제가 괜한 상상으로 엉뚱한 걸 물었어요"
수연은 유학 중 뉴욕대에서 항공우주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바로 NASA에
스카우트된 몇 안 되는 엘리트 여성 과학자 중 하나였다
치열한 경쟁 속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혼혈 동양인으로서 박사 논문 통과에 온 힘을 쏟다 보니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못한 올드미스였다
아버지를 닮아 유럽계 혼혈아 였지만 피부는 백인이 아니고 황색인종에 가까웠다
유창한 한국말은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자란 탓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어휘와 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한 달 전 내가 8박 9일 함께 동행한 '아츠코'란 여인은 도대체 누구이며
이태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수연의 엄마 아츠코는 또 누구란 말인가
이 상황을 이 여자 수연에게 말하면 그가 이 상황을 믿을 수 있을까
도저히 말로 이해시킬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순간 직감하고 있었다
'아츠코'는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유령인가
의문의 꼬리는 점점 깊은 수렁에서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나는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럼 또 누구인가......
어떤 이름 불러보면
가슴 저르르 할 때가 있다
가을 아니더라도 가을 같은 이름
꽃지고 낙엽 지면 곧 눈 내릴 텐데
그 이름 식지 않을까 고이 품에 안는다
언제쯤 그 이름 놓을 수 있을까
동백꽃처럼 떨어지면 서러울까 두려워
동박새 우는 산사
예불소리 깊어가는데
요사체 은은한 불빛 가슴 에이네
시인도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
처사의 기침 소리에 밤은 깊어가고
불러봐도 대답 없는 이름 여기 또 있네
목울대로 넘기면 꽃이 되는 이름
가만가만 되뇌어 불러봐도
툭ᆢ하니 능소화 꽃잎 떨구는 소리에
아~ 깊어가는 가을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