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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 Feb 02. 2024

9. 가족들이 모두 떠나다 2


부모님께서 한국을 떠나신 후, 동생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딸만 셋 인 우리 집은 자매들의 우애가  깊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자 서로의 아이들을 품앗이처럼 봐주기도 하고,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동생들과 함께 하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로 밑의 여동생 소망이(가명)는 아들과 딸 남매를 두었습니다. 아들이 4학년, 딸이 2학년이 되던 해에 동생이 어렵게 말을 꺼내었습니다.

"언니, 우리 아무래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것 같아. 애기 아빠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렸어. 아주 가는 것 아니고, 공부 끝나면 올 거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동생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언어의 불편함으로, 유색인종이 겪어야 하는 차별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곳 생활에 차차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만 공부하러 가겠다던 동생 가족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에 정착하여 살며, 집도 구입하고 얼마 전엔 미국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에 다시 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내 여동생 사랑(가명)이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동생입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미대에 진학했지만, 이 길이 아니다 싶어 대학진학 한 달 만에 그만두고 다시 재수해 심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심리학과에서 교수님들의 기대를 받는 우등생이었지만 취업은 전혀 엉뚱한 영어교재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이름도 알려진 영어 교재를 만드는 곳에서 커리어도, 실력도 쌓았지만 청년부에서 만난 네 살 연하 남편을 만나면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동생은 스물여덟 살 때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제부는 스물네 살, 이제 막 군 제대를 마치고 대학교4학년에 복학한 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일을 하며 남편 등록금을 대며 남편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그런데 제부는 전공한 심리학 대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 했습니다. 동생은 출산 후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시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위해 일터로 나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동생의 아이들은 시간이 있을 땐 제가  봐주거나 동생 시댁에서 봐주셨습니다. 제부는 이러한 아내의 고생과 아픔을 공감하기에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생에겐 긴긴 시간이었겠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나 제부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도 받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도, 둘째 동생도 한국에 없었기에, 비록 멀리 서울에 있는 동생이었지만, 동생이 있어 든든했습니다.

그런데 동생네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미얀마 선교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평소 소원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곳 미얀마가 제2의 고향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할 일은 많고, 일을 할 사람은 없어.

나는 우리 딸들 중에 누구라도 내 뒤를 이어 이 일들을 해 주면 좋겠다"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늘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습니다.

" 하나님, 저는 미얀마에 갈 준비가 안되어 있어요. 아이들도 아직 어리고요. 마음의 준비도 안되어 있어요. 또 같이 가야 하는 배우자는 어떻고요. 남편은 미얀마의 '미'자만 들어도 도망가며 손사래를 치는데, 그런 사람과 어떻게 갑니까. 저는 못 갑니다. 주님"


마치 모세가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저는 한사코 주님께 못 간다고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시나 봅니다. 마침 막내 동생네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묵묵히 2~3년을 조용히 준비하더니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나 미얀마로 들어갔습니다. 아직 어린 세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말이죠.


동생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오직 미얀마어를 익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젊은 동생 부부는 금세 언어도, 생활도 잘 적응해 갔습니다. 그곳에서 동생의 주특기를 살려, 영어 유치원을 운영하며 보육교사들을 신앙으로 훈련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집도, 고아원도 함께 운영하며 점점 지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부는 그곳에서 기독 청년들을 양육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통역을 따로 세우지 않아도 설교와 성경공부를 진행할 수 있는 선교사 중에 하나입니다.

미얀마 전통의상(논지)을 입고 말씀을 전하는 제부


졸지에 저는 친정 가족이 모두 떠난 한국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많이 외롭기도 했고, 모두들 나를 떠나 미련 없이 다른 나라로 가 버린 것에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감당해야 하는 부모님과 동생 가족들 애경사들, 한국에서 처리해야 하는 부모님과 동생들 세금이나 여러 가지 행정적인 것들, 법적인 문제들, 국제 우편, 택배, 외환 환전이나 송금 까지...오롯이 제가, 한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찬양하는 미얀마 사람들


처음엔 좀 억울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도 그럴듯한  멋진 일을 시켜 주시지, 왜 이렇게 해도 표도 안 나고, 자잘하고 복잡하기만 한 일들을 맡기시는지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직장도 다녀야 하고, 주말부부인지라 거의 혼자 아이들도 케어해야 하고, 주말엔 교회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있는 제가 불쌍하지 않으시냐고, 저도 좀 쉬고 싶다고, 저를 사랑하시는지 알지만, 너무 저에게 몰아서 일을 맡겨 주시는 건 아니냐고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저라도 한국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표도 안 나고, 생색도 안나는 일들이지만, 제가 라도 감당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한 일인데. 저는 이것을 깨닫기까지 몇 년을 불평으로 보냈는지 모릅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장 29)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앞에 서서 일하시는 사람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저처럼 자잘하고 번거롭기만 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서로의 달란트가 다른 것뿐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 알고 계시니까요. 언젠가 주님 앞에 서면 "정말 했다. 나의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1)


크리스마스 유치원 발표회 - 맨 앞에 동생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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