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알못이었던 내가 열심히 계절 음식 챙겨 먹는 이유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 살다가 여름만 있는 나라에 오니 가장 아쉬운 게 계절 음식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국물이 있는 탕류가 생각나고, 슬슬 더워진다 싶으면 시원한 냉면이 생각나고. 또 설날, 추석, 복날, 동지 등 날마다 먹어줘야 하는 음식들은 얼마나 다양한지. 정작 한국에서 살 때는 계절 음식에 집착(?) 하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고 내게는 선택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만 있는 호치민에 온 뒤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계절 음식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알못 아내의 고백
호치민으로 이사 오기 전만 해도 나는 집에서 거의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요알못'이었고 명절 음식은 집에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마트에만 가도 완벽에 가까운 완제품들이 많고, 2인 가족에게는 재료를 사는 게 더 비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안 그래도 부족한 나의 요리 능력치는 가물어가는 논바닥처럼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진간장과 국간장이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검블유의 송가경 캐릭터가 현실이었습니다...
호치민 정착 초기에는 직장을 다니지 않고 주부가 된 내가 '요리'를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못 하니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밥 생각만 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초기에는 요리를 못 하니까 반찬 카톡방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구입했는데, 식사 시간에 내가 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남편이 코멘트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일 정도였다. 그냥 식당에 갔을 때처럼 '여기는 음식이 좀 짜네'라든가 '여기는 재료가 좀 별로다' 정도의 멘트였는데 그게 오롯이 내게 하는 평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나는 너무 요리하기 싫다며, 반찬방에서 메뉴 고르는 것도 스트레스라며 남편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나의 구원자, 양념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자신감을 얻다
남편 앞에서 요리 트라우마(?!)를 고백하고 난 직후 우리는 본의 아니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요리를 하지 못했고, 지금 집에 정착한 뒤에는 메이드를 고용해서 일주일에 두 번은 그녀가 해 준 음식을 먹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요리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내려놓았고 잠시 한국에 갔을 때 마트를 가득 채운 온갖 양념을 보며 이제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자감이 차올랐다.
요알못의 눈에는 포장지에 쓰인 멘트 하나하나가 다 대단하게 느껴졌다. '넣고 끓이면 완성되는', '감칠맛을 더하는', '3분이면 완성되는' 등등. 이제까지 나는 왜 이런 편리함을 가까이 두고서도 시작할 생각을 못했을까. 요리할 생각이 없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문구들이 요알못을 탈출해야만 하는 나에게는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베트남으로 돌아올 때는 한국에 있는 마트를 거의 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민 가방 하나를 요리 재료로 꽉 채워 왔다. 커피 스틱처럼 생긴 조미료, 수분크림 같은 통에 든 생강/마늘/고춧가루 세트, 생전 써 본 적도 없는 버섯 가루, 요리할 때 쓰는 매실청, 국물 내는 멸치 한 가득, 밥 먹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김 두 박스 등등. 다행히 호치민에는 한국 마트가 많아서 식용유, 참기름 같은 기름 종류나 고추장, 된장, 간장 같은 장류, 또 한식의 핵심이라고 하는 대파, 쪽파와 깐 마늘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 마늘이나 양파 같은 기본 채소는 로컬 마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물론 한국 마트 가격은 한국보다 조금 더 비싸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마치 실험실에 실험 재료를 채우는 과학자처럼, 요리책의 그 어떤 양념 공격도 해결할 수 있도록 비장한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요리가 된다
나는 주입식 교육에 특화된 인재라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하는 건 자신 있었다. 남편이 보던 요리책과 저울, 계량컵, 계량스푼을 놓고 정말 레시피에 나온 대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애매한 표현들이 좀 있기는 했지만 준비물만 있으면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유튜브 레시피 (백종원 만세!)도 워낙 다양해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하루에 국 하나, 반찬 하나, 메인 요리 하나씩 하면서 조금씩 성공 경험을 쌓은 다음 요리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가 요리를 시작하니 같은 시간에 둘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요리가 훨씬 풍부해졌다. 그 전에는 내가 간단한 주방보조만 했는데 이제는 화구(!)를 나눠 쓰면서 각자 요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요리 이해도가 높아진 덕분에 서로 꽤 심도 깊은 코멘트 (멸치 육수를 너무 오래 우려서 쓴 맛이 좀 나는 것 같다, 단맛이 좀 덜한데 양파를 좀 더 볶는 건 어떨까, 이번 양념이 너무 짠 것 같은데 계란을 더 넣어볼까 등등)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요리 과정과 결과 모두 즐거워졌다. 이전에 나는 남편이 해 준 요리에 맛있다는 말 밖에는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반성...)
그러다가 자신감이 붙어서 어느 순간 '특별한 날에 먹는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내 SNS와 유튜브 피드에 계절 음식이 우르르 올라오니 생각이 날 수밖에. 물론 한국 식당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호치민이지만 내가 원하는 메뉴가 100%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호치민에서 평양냉면을 못 먹어봤다... 아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있어도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서 집에서 계절 음식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만든 계절 음식들
일 년 내내 무더운 호치민인데 연말이 되니 자연스럽게 호떡이 생각났다. 30년 넘게 한국에 살아온 내 몸 어딘가에 계절 음식에 대한 기억이 프로그래밍된 것 아닐까, 정확히 한국에서 하나 둘 호떡 트럭이 길가에 자리 잡는 그 시기에 나는 호떡을 엄청나게 갈구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한국 마트에서 호떡 믹스를 구할 수 있었고 식탁 앞에 앉아 열심히 호떡을 빚었다. 에어컨 바람맞으며 호떡 먹는 기분이란...
2019년 새해가 밝던 날, 우리 부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떡국을 먹자고 했다. 새해에 우리가 직접 떡국을 만들어서 먹어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다행히 한국 마트에서 떡국떡을 팔길래 그것만 사다가 집에 있는 재료로 떡국 만들어 먹었는데 꽤 그럴싸했다.
여름만 있는 호치민, 또 한창 더울 때는 이미 지났지만 우리 몸에는 복날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으니 때에 맞춰 삼계탕 먹어줘야지. 마트 가면 당연히 손질된 통닭 (삼계탕 끓일 때 쓰는 닭) 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 앞 마트에는 닭다리 아니면 가슴살 밖에 없었다. 오리지널리티는 좀 떨어지지만 별 수 있나, 닭다리만 사다가 삼계탕을 끓이기로 했다. 삼계탕용 약재 키트(!)는 한국 마트에 있었고, 통마늘 넣고 푹 끓이다가 양파 썰어서 좀 더 끓였더니 따로 간을 안 해도 깊은 맛이 났다.
음식의 힘, 특히 내 몸에 새겨진 음식의 기억은 정말 대단하다.
요알못인 나를, 그것도 해외에서 1년 만에 삼계탕까지 끓이게 할 정도이니... 우리 가족은 같이 닭다리만 있는 삼계탕을 나눠먹으며 (고양이 도미도 동참!) 여름만 있는 호치민에서 초복을 보냈다. 이렇게 계절 음식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나누니 잊지 못할 해외 생활 에피소드가 하나씩 쌓이는 기분이다.
이번 추석에는 무슨 음식을 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