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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pr 09. 2019

계절이 없는 도시에 산다는 것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가늠해야 하나

쓰고 싶은 글이 많았는데 봄 생각이 나서 이 글을 먼저 쓰게 됐다. 갑자기 내 귀에 꽂힌 음악 하나가 무더운 이 도시에서도 봄을 떠올리게 하다니 음악의 힘이 참 대단하다.


나의 봄 캐롤, <선인장>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


그 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 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서 있을게


지금 내 인스타 피드는 벚꽃과 봄 나들이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참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다. 요즘은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다고 하지만 내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 가로수 잎의 색,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차츰 받아들이게 된다.


정확히 작년 이맘때, 벚꽃 가득한 판교 테크노밸리

생각해보니 나도 이맘때 날씨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쌀쌀한 기운이 좀 가시고 공기가 조금씩 따뜻해지는, 벚꽃이 만개해서 어딜 걸어도 기분 좋았던,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좋은 그런 날들. 계절마다 생각나는 풍경과 음식, 옷차림이 있다는 게 새삼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걸 요즘 다시금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나는 삼십 년 넘게 계절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였었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또 나의 한 해가 시작되고 공기가 차가워지면 한 해가 지나가는. 날짜를 기억하지 않아도 내 눈에 보이는 풍경 하나로 내가 어느 시간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여름 이후 멈춰버린 나의 시간
일 년 내내 여름인 도시에 산다는 것

하지만 이 도시는 밖에 나가기만 해서는 시간이 지나감을 느낄 수 없다. 아직까지 내 눈에 이 도시는 매일 같은 풍경이고, 내게 닿는 공기는 언제나 뜨거울 뿐. 옷차림도 일 년 내내 거의 다르지 않다. 게다가 나는 한국에서 가장 무더웠을 때 호치민에 와서인지 여름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 날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까지는 워낙 도시가 떠들썩하니 그러려니 했는데 벌써 3월이 지나버린 것이다. 호치민에서의 1월과 2월과 3월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더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길에서 무슨 음악이 나왔더라? (KPOP...)

누구랑 무슨 얘기를 했더라?....


내가 분명 여기서 지내기는 했어도 뭔가 인덱스가 빠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쉬운 건 그때 내 몸에 닿는 공기의 온도를 기억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으니 한참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다, 지금에서야 깨닫고 보니 나도 이제 여기 온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조금씩 계절의 변화를 느끼다
오늘의 호치민, 어제와 큰 차이는 없지만 유독 봄날 같은 날이다

하지만 이 도시에도 나름의 계절이 있다는 걸 아주 조금 느끼고 있다. 내가 호치민에 처음 왔을 때는 매일 스콜이 쏟아지는 우기였다. 한국의 장마와는 다르게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비가 오다가도 뚝 그치고 하늘이 파랗게 개는 날. 신기하게도 한동안 늘 비슷한 시간에 비가 내려서 예측 가능하다 보니 밖에서 비를 쫄딱 맞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초반에는 한국의 여름보다 여기가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기였지만 생각보다 (내 기준 습도는 홍콩이나 대만이 훨씬 심한 것 같다...) 습하지 않았고 비가 내린 직후에는 더위가 좀 가셔서 밖에 있을만했다. 아침저녁으로는 꽤 선선했고.


한국에서 겨울이 시작될 즈음 이 도시는 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매일 비가 내리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삼일에 한 번, 점점 뜸해지기 시작하다 어느 순간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새해가 밝고 베트남의 큰 명절인 뗏 전후가 되면 낮에도 긴 바지를 입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선선해진다. (호치민에서 지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뗏 기간의 호치민이 너무나 좋다. 한산하고 날씨는 선선하고.)


그러다 기온은 점점 올라가서 요즘 4월에는 낮에 5분만 걸어도 온 몸이 땀범벅이 되고 2-3일에 한 번 비가 내린다. 조금씩 공기 속 습도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해가 진 뒤에도 수영장 물이 차갑지 않은 그런 건기의 끝자락에 접어든 것이다.

 

단순히 건기와 우기만 있다고 생각했던 이 도시에도 여름의 단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나니 내가 흘려보낸 날들에도 작은 책갈피 하나씩 끼워둔 것 같다.



* 호치민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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