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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Sep 17. 2019

회사 안 다녀서 좋겠다는 말

직업이 없는 거지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만

베트남 가니까 좋지? 하루 종일 뭐해?


진짜 부럽다, 회사도 안 다니고


베트남으로 이사 온 지 이제 일 년. 해외생활을 하면서 사는 공간을 옮긴 것 외에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주변 사람 중 95% 이상은 (자기 것이든 남 것이든)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소속이 없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회사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겉돌게 됐다. 또 사회생활을 가장 활발히 하는 30대, 이 나이 때의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이에도 일 이야기를 한다는 걸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알았다. 


나도 아마 회사 다닐 때는 쉴 새 없이 일 이야기를 했겠지. 회사에서 빡쳤던 얘기, 회사에서 만난 사람 얘기, 직장인의 일반적인 고충이나 내가 일하는 업계에서만 있는 독특한 에피소드 등. 회사에 하루 1/3 이상을 보내니 당연히 이야깃거리도 그 안에서 많이 나올 수밖에. 


하지만 베트남에 오고 나서부터는 누가 일 이야기를 꺼내면 내 이야기는 다 과거형이었고 그러다 말이 점점 없어졌다. 초면에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했을 때 '프리랜서예요' 하고 부가 설명을 해도 다들 갸웃하는 게 느껴져서 나도 내가 하는 일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글은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직업이 없어요


- 내가 고를 직업도 없고 현재 직업 상태값도 '없음'입니다


브런치 작가 직업 선택. '무직'도 '주부'도 없다.

누군가 지금 내 직업을 물으면 그나마 '프리랜서'에 가깝다. 프리랜서(freelancer)란, 일정한 소속 없이 자유 계약에 의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 하지만 가장 정확한 건 지금의 나는 '직업은 없지만 일은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직업에 퍼센티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 100% 프리랜서(=전업 프리랜서)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베트남에 오고 나서 브런치 프로필을 편집할 때 직업을 선택하는 필드가 있었는데 '무직'이 없어서 순간 멈칫했다. 하긴, '직업' 선택지에 '무직'이 있는 것도 아이러니고... 그나마 지금의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프리랜서, 크리에이터와 이전의 나를 말해주는 기획자를 골랐다. 


글을 씁니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은 아니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일단 내가 하는 일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것에서 파생된다. 목적과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 텍스트 위주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다.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은 '작가세요?'라고 묻는데 이게 또 나를 멈칫하게 한다. 작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책을 낸 사람' 혹은 이미 등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저 책을 내고 싶은 브런치 등단 작가일 뿐.


1) 리포트를 씁니다


베트남에 오고 나서 자연스럽게 나는 이 곳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실제 통계는 어떤지 궁금해졌다. 또 예전에 하던 일의 관성이 있으니 여러 서비스들이 알고 싶어 졌다. (그래서 서비스 분석하려고 매거진을 새로 만들었는데 요즘 업데이트가 뜸해서 뜨끔...) 내가 기록한 내용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더니 주기적으로 리포트를 받고 싶다는 의뢰도 있어서 열심히 자료 조사를 하고 리포트를 쓰고 있다. 


이 일을 하다 보니 그냥 지내는 것보다 조금 더 날을 세우고 지켜보게 되고, 베트남에서의 삶이 지루하지 않고 '관찰할 거리'가 있는 공간이 되었다. (호기심 많은 내게 딱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피부로만 느꼈던 걸 좀 더 정제된 정보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좋다. 


참, 나는 구글링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해외 시장 관련해서는 KOTRA에 웬만한 정보는 다 있다. 역시 대한민국 만세. 


2) 베트남 이야기를 씁니다


브런치에 쓰는 글은 직접적으로 수익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남들이 '그럼 왜 그렇게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써?'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내가 보고 느낀 걸 기록하고 싶었고, 그다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트남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며,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한 브랜딩을 하고 싶어 졌다. 왜냐하면 난 소속이 없으니까 나를 포장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내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는데 지금은 이 플랫폼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남기는 중이다. 덕분에 종종 브런치를 통해 몇 가지 제안이 들어오곤 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일석이조

나는 최근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하나 마쳤다. 내 브런치를 보고 출판사 길벗이지톡에서 신간 <베트남어 회화 핵심패턴 233> 홍보를 위해 베트남 이야기를 네이버 포스트에 연재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했는데 베트남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은 나는 바로 OK 했다. 내 브런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길벗이지톡의 포스트 팔로워는 무려 3만 명이다...) 나의 베트남 글을 볼 것이라 생각하니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고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책이 책이니만큼 마지막 베트남어 한 문장은 정말 실생활에서 내가 쓰는 것들 위주로 선정! (급하면 아무 말이나 막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면서 마감 맞추는 습관도 들이고 베트남어 공부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이 책은 나처럼 베트남어 공부 기초를 마치고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에게 딱인 게 머리로는 아는데 입에 안 붙어서 버벅대던 문장들을 바로바로 쓸 수 있게 해 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면! 


** 네이버 포스트에 10주간 연재한 글은 여기에!


3) 아주 가끔 기획서도 씁니다


사실 이건 아직 제대로 해 본 적 없지만 그래도 하는 거니까 써본다. 예전에 내가 했던 일을 남들에게 얘기할 때 나는 '서비스 기획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기획자'라는 직군은 IT회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해하기 힘들고 세상에 너무나 많은 유형의 기획자들이 있어서 어차피 풀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서비스 기획자라고 해도 각자 특화된 분야가 있어서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저는 택시 기획자였습니다

내가 했던 일은 한 줄 요약하면 앱에 들어가는 기능들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개발자, 디자이너와 협업해서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이다. 요구사항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고 이걸 교통정리하는 것부터가 일의 시작이다. 그다음 기획서 작성을 포함해서 데이터 분석, 서비스 정책 수립, CS 대응 등등등을 한다. (물론 그 사이사이 커뮤니케이션의 양은 어마어마함... 서비스 기획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도그냥 작가님의 브런치를 참고하시길) 


여하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요구사항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기본적인 정책을 세운 다음 기능을 정의하는 것. 이건 쓸 얘기가 많아지면 그때 따로 매거진을 파서 자세히 쓰는 걸로. 



이번 글은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맴돌던 주제지만 정돈하기가 쉽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베트남에 와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도 내게 논다고(?!) 뭐라 하지 않았고 취업하라고 등을 떠민 적 없는데 그냥 내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경단녀'가 내 얘기가 되는 것도 싫었고, 나중에는 '아니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했나' 싶은 생각이 들길래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서. 


Do what you love


그래서 나는 이렇게 직업은 없지만 일을 하는 상태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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