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작가 자의식 생성기
내가 말한 게 아니라 하루키가 저렇게 말했다. 이제 하루키의 말뜻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왠지 닮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닮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20. 작가들은 죄다 이기적일까?
일단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재정의 할 필요가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뭘까? 무슨 의미일까?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할 생각도 안 하지만) 글을 쓸까?
글은 문자다.
문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곧 상상력을 자극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려면 그걸 이해하고 알고 있는 머릿속 정리함에서 용어를 꺼내서 다시 복기해야 한다.
글은 그걸 한다.
하지만 이제 그게 소설일 경우에 (그러니까 창작 글쓰기일 때)
이 말은 아주아주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지냐면.
머릿속 정리함에 있는 용어를 죄다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작가의 입맛에 맞춰서 말이다. 예를 들어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 가는 게 상식이라면 작가는 초록색이 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건 아주 예민한 문제인데 왜냐면 이게 교통법규가 아니라 사상에도, 도덕에도, 젠더이슈에도, 사회에도 통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지만 너무 잘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라는 말이 조롱처럼 쓰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진짜 소설을 쓰는 내 입장에서는 뜨끔뜨끔한 것 같기도 하다.
결국 글은 쓰는 사람을 드러낸다.
아주 날것 그대로 말이다.
우린 다 옷을 입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날것 그대로 알몸인 사람을 만나면 놀라기 마련이다. 특히 그게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다를 때는 거부반응이 나온다.
자아.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
나쁘고 맞고 옳고 틀리고 그르고. 어쩌고 저쩌고.
그건 다 내 관점이고.
저 사람은 저 관점인 거다.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거리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작가와 독자가 '깊은 마음 속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인 것처럼,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저 사람과 나는 서로 같은 이야기를 간직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냥 그것 뿐이다.
상처 받지 말자. 상처 주지도 말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 사람이 너무 힘들면 피하자. 자리를 피하고 문자를 피하자. 내가 없어도 그는 이야기를 할 테고, 이 세상에 그는 존재한다.
결국 우린 함께 존재한다. 그렇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결론: 작가들은 죄다 이기적일까?
-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다. 다만 글을 쓰기 때문에 더 날것이 나온 것 뿐이다. 안 맞으면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눈 가리고 아옹해도 어차피 우리는 지구에 함께 존재한다. 내가 몰랐던 것일뿐 그 사람과 난 이 시대에 함께 존재한다. 내가 보기 싫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냥 서로 같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지 않은 것 뿐일 수 있다. 나와 너무 다르다고, 내가 싫어하는 걸 가졌다고 놀라고 개복치처럼 기절하지 말고 닌자처럼 자리를 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