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가는 대로 소설 써보기_만연체 느낌으로
부제 : 행복은 아날로그
아름다움은 다른 누군가의 추함으로부터 그 자신이 존속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다. 흑색이라고는 없는 백색의 세상에서는 밝음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작금의 나의 뒤엉킨 심사는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단초이자 디딤돌에 불과한 것인가? 혹은 이 한 톨의 먼지만 한 위안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삶의 목표이자 지향점일 것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위안과 죄책감을 떠안아야만 하는 것일까? 전지전능한 3인칭이 아닌 1인칭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시야와 식견으로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처럼 절대적 진리에 닿지 못하고 날개가 녹아내리는 슬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하루를 깨우는 알람 소리는 상업적으로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하루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담당한다는 책무에 의해 그 소리를 듣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본연의 가치를 꽃피우지 못한 채 싫은 소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목을 옥죄는 알람을 한사코 꺼버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출근을 위한 심신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한다. 최소한의 사회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정도로 세안과 양치, 머리감기를 마치고 나면 사무실을 지나는 누구에게도 책잡히지는 않을 정도의 상의와 하의, 양말을 골라 잔뜩 피로로 휘감긴 몸 위를 덮는다. 그렇게 빠뜨린 것은 없는지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고민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방문을 열고 각박한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 척은 할 수 있게 된다.
중력은 필시 절대적이지 않다. 문밖을 나서 사무실 문고리를 잡는 아침나절의 중력은 평소의 몇 곱절은 되는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그렇게 한껏 억눌린 자세로 문고리를 잡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점이다. 일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한다는 행위이다.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혹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관계없이 일단 시작된 하루는 관성을 띤 채 별다른 외력 없이도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조용하고도 정직하게 움직인다. 그 고요한 움직임 속에는 상사로부터의 핀잔, 옆팀 부서와의 말다툼, 동기와의 짧은 대화 및 푸념 등 다양한 소리가 은은하게 스며들어있다. 향기는 나지 않지만 악취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경미한 쿰쿰함이 사무실 전반을 휘감고 있다.
올곧은 직진성을 가지고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던 하루는 퇴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방파제삼아 충돌하듯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 움직임을 멈춘다. 그 물보라 속에서는 하루를 큰 문제없이 살아냈음에 대한 내면적 안도감과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채 끝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잔향 같은 미련들이 부서지듯 갈라져 나간다. 그렇게 퇴근을 위해 차량 운전석에 앉는 순간에야 파도는 잠잠해지고 오롯이 나만의 시공간에 빠져든다. 이제는 몇 번이나 들었을지도 모를, 가사까지 다 외운 옛날 R&B를 들으며 퇴근길의 물결에 몸을 싣는다. 물리적으로는 출근길의 역행이 퇴근길이지만 심리적 의미와 무게감은 전혀 다르다. 출근길에 느껴졌던 그 무게감은 이제는 그 방향을 달리 하여 나의 심신을 가볍게 하고 고양시킨다. 다만 이 고양감은 나를 지면에서 떠오르게까지는 못하고, 겨울철 빙판길에 선 것처럼 아주 살짝 마찰을 줄여주는 정도의 도움을 준다. 각양각색의 차들이 삼차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도로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퇴근길이 중첩되어 있다. 누군가의 차 안에서는 성취감이, 또 누군가의 차엔 실망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들의 수류를 타고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집 앞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나만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키를 돌리며 나의 하루는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