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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하자 Aug 22. 2021

소설 쓰기 #7 _ 안타까운 찬물 한 바가지

소설이 술술 읽힌다는 것은 가독성, 재미, 상상이 쉽도록 묘사를 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제 읽은 어떤 소설(제목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작가님에겐 참 죄송하지만 이해하시길)의 한 문장을 예시로 들겠다.

쉽지 않은 인터뷰가 예상됐다. 인터뷰 당일, 순민은 투덜거리며 약속 장소인 병원에 도착했다.
 "아니 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하필 황금 같은 공휴일 오라는 거야?"
인터뷰만 아니었다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만, 인터뷰를 빨리 끝내고 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간 그는 간호사실을 지나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 병실 앞 환자명부에 홍길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뭔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찾았는가? 나는 인칭의 실수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시간낭비 하는 멍청이가 아니다. 다만 눈에 거슬리고 방해가 되는 것뿐이다. 이 글은 전지적 소설이었다. 그런데 문장 시작부터 이상했다.


쉽지 않은 인터뷰가 예상됐다. (1인칭)
순민은 투덜거리며 약속 장소인 병원에 도착했다.(전지적)
인터뷰만 아니었다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1인칭)
어쩔 수 없지만 인터뷰를 빨리 끝내고 가기로 했다.(1인칭)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간 그는 간호사실을 지나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전지적)


전지적 소설이라면 최소한 인칭 대명사를 써서 영화 보듯 따라가는 느낌은 줘야 한다. 이 부분만 발췌를 해서 그렇지, 곳곳에 이런 문장이 많았다. 작가님의 실수다 뭐다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분의 스타일 수도 있다. 또한 독자가 괜찮다고, 읽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상관없다. 


왔다 갔다 하는, 정신없는 카메라 앵글처럼
단락에서 인칭이 이리저리 움직여 버리면
어떤 이를 지칭하는지, 누구의 얘기인지... 
읽기가 싫어지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전지적 관점은 내가 신(神)이 되어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1인칭은 나, 내가, 나는, 말 그대로 내 주관적인 입장과 감정을 적으면 된다.


하지만 첫 문장 [쉽지 않은 인터뷰가 예상됐다'] 이렇게 써버리면 1인칭인 것이다. 그가? 그는? 그들은? 아무리 인칭대명사를 넣어도 문장은 완성되지 않는다.


<쉽지 않은 인터뷰가 될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로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와 됐다는 완전히 전혀 아예 다르다.



[인터뷰만 아니었다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만 인터뷰를 빨리 끝내고 가기로 했다.] 차라리 이것을 따옴표 안으로 밀어 넣었더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분리되어 나온 이 문장은 전체 흐름을 깨고 있는 것이다.


전지적 관점과 1인칭의 내가 혼란스럽게 섞여있다. 누가 누굴 말하는지 나는 몇 번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흐름에 방해되지 않고 재미있으면 된다고.
맞다. 그런데 읽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어떤 이의 감정을 말하는지 헛갈리게 된다.
그것은 인칭의 오류가 주는 껄끄러움인 것이다.

이 컵에 먹는 것보다 유리잔이 좋은데...

누님. 오늘은 왜 여기다가 주셨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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