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일원
마주한 적 없는 인연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외출이 늘었다. 처음엔 공간 기획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집을 나섰다. 근데 다니다 보니 여행을 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한 번은 시인의 방이라는 곳에 가기 위해 전남 부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 심지어 들어 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시인의 방은 변산바람꽃이라는 숙소에 있는 1인 객실이었다. 숙소 주인 분이 안도현 시인을 위해 직접 만드신 방이라 했다.
안도현 시인이 머물며 시를 쓴 방. 작가가 와서 글을 쓴 곳이라니. 출판전야를 준비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주말엔 예약이 어려워 평일에 휴가를 내고 다녀왔다.
차가 없었기에 고속버스를 타고 부안 버스터미널까지 갔다. 터미널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이었다.
어떤 버스를 어디에서 타야 할지 헷갈려 한참을 헤맸다. 정류장에 계신 분들에게 묻고 물어 겨우 찾아 오래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타고 부안 시내를 벗어나자 비로소 여행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달리 역 사이가 멀었다. 마을 단위로 버스가 섰다.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어서 정류장이 섬처럼 느껴졌다.
논과 밭 그리고 바다. 도시인에게는 생경한 풍경을 1시간 정도 흘려보내니 숙소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선 바다를 접한 집들이 보였다.
서울 집에서 숙소까지 5시간은 넘게 걸린 여정. 지칠 법도 했지만 숙소를 보니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주인 분이 세운 목조 가옥이 고고하게 바다 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예약한 시인의 방에 체크인했을 때 소박함에 놀랐다. 3평 정도되는 방. 그 안에 목재 책상, 침대 그리고 작은 냉장고 하나.
외견을 살피는 것엔 5분도 걸리지 않는 방이었지만 깊이가 느껴졌다. 목재로 만들어져서인지 켜켜이 쌓인 세월이 느껴졌다. 먼저 다녀간 투숙객들의 흔적이 새겨진 듯했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습했지만 해가 잘 들어 괜찮았다. 특히 책상 위에 볕이 드는 모습이 참 예뻤다.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한 나무 책상. 책상이라는 단어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돌아와 글을 썼다. 동시에 어떤 요소가 글을 쓸 때 도움이 되었는지 살폈다.
기본적으로 주위에 유혹하거나 방해하는 요소가 없는 게 주요했다. 방 안에 나밖에 없고 방을 나가도 나뿐이었다. 외딴 곳에 위치한 숙소의 1인 객실이 갖는 장점이었다.
더 나아가 시인의 방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감돌았다. 책상 앞에 앉으면 먼저 다녀간 투숙객들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또한 여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에서 무언가를 썼겠지. 이 책상과 의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안도현 시인이 있으려나.
나도 이 방을 휘감는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바통을 전달 받은 느낌. 이러한 감각 덕분에 글이 더 잘 써지는 것 같았다.
한창 글을 쓰다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 방명록을 봤다. 방명록을 읽으니 시인의 방에 깃든 마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안에서 한 차례 더 들어와야 하는 변산의 외딴 숙소까지 찾아온 투숙객. 그들은 고독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방명록에 적힌 구체적인 사연은 각자 달랐지만 오롯이 홀로 품어야 할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건 같았다. 모두 자신의 무거운 고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밤을 지새웠겠지.
우리가 고독으로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 느낀 감각. 이런 경험을 출판전야에서도 선사하고 싶었다.
방명록을 읽고 늦은 밤까지 글을 쓰다 별을 보러 바깥으로 나갔다. 밤 하늘을 바라볼수록 점점 더 많은 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득 출판전야를 시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전야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을까. 덕분에 내 세계가 넓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에 갇혀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출판전야.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내 안에 남기는 게 있겠구나 확신했다.
다음 날 나 또한 고독의 바통을 놓고 시인의 방을 떠났다. 언젠가 다시 바통을 건네받을 날을 기약하며.
시인의 방에서 출판전야를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