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에 서기
신년의 기운을 받아 올해엔 반드시 출판전야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새해 다짐이 금방 무너질 때가 많았기에 열정이 충만할 때 일을 저지르는 게 좋았다.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소식을 받아보던 건축 디자이너 님이 떠올랐다. 본업인 건축 외에도 유튜브, 매거진 등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분이었다.
건축물을 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담긴 브이로그, 친구의 친구를 인터뷰하는 매거진 FoF. 디자이너 님이 남긴 흔적을 보니 회사원보다는 자기만의 색이 뚜렷한 예술가 같았다.
출판전야가 예술가를 위한 장소인 만큼 예술가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용기를 내서 디자이너 님에게 DM을 보냈다.
출판전야라는 이름의 서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인테리어 상담을 할 수 있을지 여쭤봤다. 감사하게도 디자이너 님은 흔쾌히 사무실에 놀러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휴가를 내고 디자이너 님이 일하고 있는 DayDay Architects(이하 데이데이)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은 데이데이 팀이 직접 디자인하고 공사한 곳이었다.
사무실에 가니 디자이너 님뿐만 아니라 데이데이 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와 여기저기 자유분방하게 쌓인 짐, 옹기종기 모여 일하는 팀원들.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언더독의 아지트 같아서 좋았다.
데이데이는 건축 디자인, 시공, 브랜딩 각 분야별 전문가가 하나의 온전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뭉친 팀이었다. 직장을 다니며 출판전야를 만들어야 하는 내겐 데이데이 팀의 작업 방식이 알맞았다. 분야별로 잘하는 업체를 살펴볼 여유도 없었고 다 다른 업체에 맡기면 중구난방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었다.
조그마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디자이너 님과 출판전야에 대해 얘기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 공간 기획서가 도움이 됐다. 다행히도 데이데이 팀에선 출판전야를 함께 만들면 재밌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문제는 아직 공간이 없다는 거였다.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일정은 얼마나 걸릴지 등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려면 공간을 구해 와야 했다.
꼭 공간을 마련해 오겠다는 말과 함께 데이데이 사무실을 나섰다. 마음이 급해졌다. 공간을 구하는 중 데이데이 팀에 다른 프로젝트가 잡힐까 걱정이 됐다.
다음 날부터는 부동산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부동산과 통화하는 게 무서웠는데 몇 번 하니 익숙해졌다. 부동산 중개인 분이 전화를 받으면 원하는 조건을 줄줄 읊었다.
보증금 1,500만 원 이하
월세 100만 원 이하
10평 내외
저층(2~3층) 선호
우선은 내가 사는 석촌 위주로 찾았다. 익숙한 동네고 집이랑 가까우면 관리하기도 좋았다. 근처에 석촌호수나 석촌고분처럼 산책할 곳도 있고.
발품을 파니 네이버 부동산에 올라오지 않은 매물들을 볼 수 있었다. 알짜배기 매물은 나오면 바로 나가니 보통 네이버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석촌에는 마음에 드는 곳이 딱히 없었다. 교묘한 밸런스 게임처럼 아쉬운 점이 하나씩 있었다.
금전적인 조건이 맞으면 너무 좁거나 지하였다. 반대로 마음에 든다 하면 월세가 200만 원을 가볍게 넘겼다. 내 눈에 이쁘면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겠지.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린 건 동네 분위기였다. 과연 출판전야가 석촌과 어울리는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괴리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출판전야는 예술가가 많은 지역과 어울렸다. 그들을 위한 장소니까. 석촌은 좋은 동네지만 예술가의 동네는 아니었다.
롯데월드, 석촌호수, 송리단길로 대표되는 잠실과 석촌 일대는 창작보다는 소비에 치중된 곳이었다. 예술가를 품기엔 석촌 부근의 월세가 너무 높았다.
레이더의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을지로, 성수, 망원, 서촌. 어디까지나 내 주관으로 예술가가 많을 것 같은 동네를 살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매물을 보러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좋은 물건일수록 금방 나가서 토요일까지 기다리기 어려웠다.
휴가를 내거나 부동산 중개인 분에게 양해를 구해 평일 이른 오전 시간을 활용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오전 10시 다 되어 일어나던 사람이 6~7시에 일어나려니 비몽사몽했다.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을지로, 성수, 망원에 매물을 보러 갔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나의 의지를 가늠했다. 출근 전 혹은 퇴근 후에도 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마지노선은 을지로였다. 그 이상의 거리는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부담이 됐다. 한두 번 가는 건 괜찮지만 일주일에 몇 번을 오가면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을지로는 석촌 다음으로 출판전야의 주요 후보지가 되었다. 집과의 거리는 물론 보증금/월세도 괜찮았고 인쇄소가 모여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출판과 인쇄는 가까운 사이니까.
내 눈에 들어온 매물도 인쇄소 바로 앞에 있었다. 나에게 특별한 인쇄소였다. 독립출판을 할 때 내 책을 인쇄한 곳이었으니까. 그것도 두 차례나.
내 책이 태어난 곳 앞에 출판전야가 열리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운명처럼 다가온 매물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바로 부동산에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