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기획서
출판전야를 위해 매달 50만 원을 저축하고 회사 보너스가 들어오는 대로 전용 통장에 이체했다. 덕분에 돈이 어느 정도 모이긴 했지만 숙소를 만들기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서재로 만들기로 하고 필요 예산이 5,000만 원으로 줄자 고지가 보였다. 조금만 더 모으면 된다라는 생각에 쓰고 남은 생활비도 보탰다.
2023년 말이나 2024년 초 정도면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바로 출판전야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하드웨어(물질)적인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니 소프트웨어적인 조건에 다시 눈이 갔다.
출판전야의 내실이 충분히 다져졌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공간 기획은 처음 하는 거라 어느 정도면 준비가 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특히 블루도어북스, 책바와 같은 장소에 다녀오면 그런 마음이 더 들었다. 이런 곳도 처음부터 잘하지는 않았겠지만 준비해야 될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조바심 덕에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되긴 했지만 마침표는 필요했다. 안 그러면 끝도 없이 준비만 하다가 흐지부지 될 테니까.
최선은 선의 적이라 했다. 한 차례 끊고 가는 게 필요했고 공간 컨설팅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친구는 공간 기획서를 써 보면 좋을 거라고 얘기해 줬다.
출판전야를 모르는 사람, 예를 들어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출판전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춰 출판전야 기획서를 쓰기로 했다.
인스타그램 게시글 여기저기에 흩어진 출판전야 관련 아이디어를 모아 PPT 문서로 만들었다. 문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했다.
출판전야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서 앞부분에 개요를 넣었다. 출판전야의 캐치 프레이즈, 공간 한 줄 설명 등을 적었다.
출판전야의 시작점이 되어 준 문장을 실었다. 협업하는 분들과 고민의 궤를 같이 하기 위해선 출발 지점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출판전야의 세계관에 나오는 키워드들을 정리했다. 키워드별로 더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는 인스타그램 게시글 링크도 달아 놓았다.
출판전야의 목차라 할 수 있는 공간 구성표를 넣었다. 각 공간이 출판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적었다.
출판전야가 들어설 공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지 정리했다. 지역, 면적, 예산 등의 정보를 적었다.
출판전야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때야 하는지 키워드별로 설명했다.
출판전야의 각 공간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공간에 들어가야 하는 요소별 설명과 레퍼런스 이미지를 함께 남겼다.
기획서를 쓰니 출판전야에 대한 생각이 정리됐다. 그동안 쌓아온 기록을 한 곳에 모으니 자신감도 생겼다. 이 정도면 시작할 준비가 된 게 아닐까.
근데 공간 기획서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한 게 맞는지 헷갈렸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공간 기획서를 보여 줬고 이 정도면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 줬다.
기획서를 완성한 날이 20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원두 냄새가 잔뜩 밴 채 카페를 나서니 거리에 흰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두터운 눈 아래 잠들어 있는 새싹이 움틀 때 출판전야도 세상에 나오길 바랐다.